[초점] 독단적 운영·비민주적 의사결정·권력화 '불합리의 집합체'...의·병협 "건정심, 이번엔 진짜 바꾸자"

지난달 29일 열렸던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회의를 기점으로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병원협회 '보험라인' 임원들이 줄줄이 사퇴를 선언하고 나섰다.

이들은 사퇴 배경으로 입 모아 "불합리한 건정심의 의사결정 과정을 더 이상 묵과할 수도, 그에 참여할 수도 없다"고 했다. 건정심의 구조를 개선하지 않고는 올바른 의료정책을 논의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다는 입장이다.

주지하다시피 건정심 구조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의료계 안팎에서 수년째 반복돼 오고 있다. 건정심, 그곳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무엇이 개혁의 목소리를 부르고 있는 걸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일단 지난달 29일 건정심 현장으로 돌아가봤다.

·병협 '보험라인' 줄줄이 사퇴 선언..."건정심, 이상 참아!"

▲지난 29일 열린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회의. 이날 회의를 기점으로 의협과 병협의 보험라인 임원들이 줄줄이 사퇴를 선언했으며, 이를 계기로 건정심 구조개편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복지부 전문기자협의회

보건복지부는 이날 건정심 회의를 열어 의원급 차등수가제 폐지안과 병원급 2016년 수가(환산지수) 결정의 건을 논의했다. 내년도 병원급 수가를 1.4% 인상하는 안은 논의 끝에 통과됐지만, 의원급 차등수가제 폐지안건은 표결까지 간 끝에 찬성 8명, 반대 12명으로 안건 통과가 무산됐다.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수가를 낙점받은 병협, 그리고 13년 만의 제도 개선 기회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장면을 눈 앞에서 목격한 의협의 반발은 어찌보면 당연한 시나리오였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각 단체들의 항의 성명 발표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건정심 이후 의협과 병협의 보험라인 임원진들이 줄줄이 사퇴를 선언하고 나선 것. 30일 임익강·홍순철·서인석 보험이사가 일괄사퇴 의사를 밝힌데 이어, 1일에는 병원협회 이계융 상근부회장(병협 수가협상단장)과 한원곤 기획위원장, 민응기 보험위원장, 정규형 총무위원장이 사퇴의사를 표명했다.

건정심의 결정에 반발해 의·병협 보험라인이 줄줄이 사퇴를 선언하는 유례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같은 날 의협과 병협은 공동 입장문을 내어 "29일 열린 건정심에서 보여진 비합리적인 의결과정에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며, 향후 건정심 구조와 의결과정 등 문제 개선을 위해 함께 힘을 모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건정심 구조개혁 문제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차등수가폐지, 재논의 요구에도 표결 강행...건정심 운영규정 스스로 어겨

양 단체들은 29일 있었던 건정심의 의사결정 과정이 그간 의료계 안팎에서 제기해왔던 '불합리의 집합체'와 같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양 단체가 입장문에서 언급한 "비합리적인 의결과정"은 이의 점잖은 표현이다.

첫째는 차등수가제 표결 과정의 문제다.

복수의 건정심 관계자에 따르면, 이날 해당 안건의 표결처리를 놓고 건정심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위원이 정부에 보완방안을 요구하는 등 재논의 가능성을 열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

실제 공익위원 신분인 A위원 등은 정부가 내놓은 차등수가제 폐지에 따른 개선방안이 미흡해 받아들이기 힘든 만큼 이번 회의에서 표결로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라, 안을 보다 구체화해 차기회의에서 재논의하자고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국회 회의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비웠던 차관을 대신해 건정심 위원장 대행을 맡았던 A교수가 안건에 대한 표결을 강행했고, 결국 차등수가제 폐지안은 '부결'되는 결말을 맞았다.

표결은 무기명투표로 진행됐으며 차등수가제 폐지안의 상정과 토론, 표결까지 걸린 시간은 30분 남짓이었다.

공급자 단체들은 이를 '독단적 운영'의 단면으로 짚었다.

한 공급자 단체 관계자는 "건정심 운영규정을 보면, 위원회에서 무기명 투표를 진행하고자 할 경우 일단 그에 대한 의결을 거치도록 하고 있는데, 이날 진행을 맡았던 A교수는 의결은커녕 위원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무기명 투표 진행을 선언했다"며 "건정심이 정해놓은 규칙을 스스로 위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A교수는 정부 추천 몫으로 참여한 공익위원 신분이다.

"수가협상 못했으니 주는대로 받아라?"...공급자 개선요구에도 '묵묵부답'

병원급 수가결정 과정에서는 병협이 제안한 안이 아예 전체회의 상정안에서 누락되는 일도 벌어졌다.

복수의 건정심 관계자에 따르면 29일 전체회의 이전 열렸던 건정심 소위원회에서 건보공단이 병협에 최종적으로 제시한 수가인상안을 기본으로 하되, 소수의견으로 병원협회가 내놓은 수치를 병기해 전체회의에 올리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29일 열린 전체회의에서는 관련 내용이 함께 상정되지 않았고, 공단 안만을 기본으로 논의가 진행됐다. 건정심은 이날 공단이 제시한 수치 그대로, 병원협회의 내년도 수가를 확정지었다.

공급자단체들은 건강보험정책에 관한 최고 의사결정기구라는 이름과 달리, 건정심 내부에서는 안건 심의와 의결이 비민주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강력히 항의하고 있다.

병협 관계자는 "수가협상이 결렬되면 공급자단체에서 마지막으로 제안한 제시안은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공단이 제시한 안만 올리거나 여기에 일정 패널티를 부과해 일방적으로 안을 만들어 올려 처리하고 있다"며 "공급자단체쪽에서 수차례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권력화'된 건정심, 의료단체 입장문 내자 "내용 바꿔라" 항의도...

회의장 밖에서도 문제는 계속됐다. 일부 건정심 위원이 건정심 결정에 항의해 의료단체들이 발표한 입장문을 수정하라고 요구하는 비상식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

의협과 병협은 1일 공동 입장문을 통해 건정심 운영과정에서의 문제를 지적하고, 이의 개선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양 단체는 입장문을 통해 "29일 상정된 안건의 비합리적인 의결 과정에 강력한 유감"을 표명한 바 있다.

이들은 건정심 위원 구성의 공정성·대표성 문제와 안건 심의과정에서의 비민주성을 지적하면서 "가입자와 공급자가 상생하는 지속가능한 건강보험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중립적인 공익위원의 위촉, 건정심 의결기능 지양, 조정·중재기능 강화 등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이를 위해 건정심 개선을 위한 TF를 구성해 구체적인 개선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양 단체의 성명이 발표된 직후, 의협과 병협은 건정심 모 위원으로부터 "(입장문의 일부 내용을) 삭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해당 문구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됐고, 이를 수정하지 않을 경우에는 향후 논의과정에서 불이익을 주겠다는 취지였다.

의료계는 이를 권력화된 건정심의 또 다른 단면으로 보고 있다.

공급자 단체 한 관계자는 "입장문 발표 직후, 건정심 모 위원이 전화로 연락을 해 '해당 부분을 삭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확인했다. 그는 "전문가 단체들이 의견을 모아 낸 입장문의 조문 하나까지 수정을 요구할 정도로, 건정심의 힘이 막강한 상황"이라며 "이러니 건정심에서 무슨 이야기가 되겠느냐"고 씁쓸해했다.

건정심 구조개혁 '좌절의 역사'…이번엔 될까? 

공급자단체들은 건정심 구조개편을 잘못된 의료제도를 바꾸는 첫 걸음이자 필수 전제조건으로 보고 있다. 수년째 이를 요구했고, 지난해 결실을 보는 듯했지만 여전히 좌절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 복지부는 지난해 2차 의정협의를 통해 건정심 구조개혁을 약속, 의료계의 기대를 모은 바 있다.

당시 복지부는 "건정심을 바꿔야 잘못된 의료제도를 바꿀 수 있다"는 의료계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건정심의 객관성을 제고하는 방안을 마련해 연내 입법작업에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복지부 권덕철 보건의료정책관은 의정협의 결과를 발표하며 "현재 8명의 공익위원들을 주로 정부 추천인사로 하고 있으며, 이에 의사협회에서 지속적으로 공정성 문제를 제기해왔다"고 밝히면서 "건정심이 더욱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차원에서 의료계의 요구를 수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원격의료 논란과 의료계 내부의 역학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리면서 2차 의정협의 이행이 계속 미뤄지면서, 복지부의 건정심 구조개편 약속도 함께 '캐비넷' 속에 잠겼다.

국회 차원에서 제출된 박인숙 의원의 건정심 구조개편 법안 또한 수년째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 상태다.

의협 관계자는 "현재의 잘못된 보건의료정책의 대부분이 건정심을 중심으로 한 잘못된 의사결정 구조에서 기인한다"며 "잘못된 의사결정 구조를 개선하지 않고는, 근본적인 제도개혁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입자와 공급자가 상생, 지속가능한 건강보험 체계로 나가려면 조속한 시일 내에 건정심과 관련된 문제들이 개선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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