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의사 현대의료기기 허용 등 '규제 기요틴' 반발...대정부 투쟁 재점화

4대 1.

참패에 가까운 스코어. 정부 '규제 기요틴'에 대한 얘기다.

한의사 현대의료기기 사용 허용, 비의료인 유사의료행위 허용 등을 골자로 하는 정부의 대규모 규제 철폐, 이른바 '규제 기요틴(단두대)' 발표로 신년 벽두부터 의료계가 들썩이고 있다.

의료계는 이번 발표를 사실상 '의료영역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분 아래 정부가 전문가들의 의견은 무시한 채 의료체계의 근간을 흔들려 한다는 주장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부는 이번 기요틴 과제 선정에 있어, 기존 의료계의 주장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의사와 한의사, 의사와 미용사, 의사와 문신사 등 의사와 타 직역간 팽팽한 싸움판에 끼어들어 모두 상대편의 손을 들어줬다.

정부 발표 이후, 의료계에는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지난해 파업사태로까지 이어졌던 '대정부 투쟁'의 불씨도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 

규제 기요틴 '부활'...대규모 개혁 예고

앞서 정부는 지난해 12월 28일 국무조정실 주관으로 민관합동회의를 열어 이른바 '규제 기요틴' 과제 114건에 대해, 해당 규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해 나가는 방안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규제 기요틴은 1980년대 일부 유럽국가가 대규모 규제 철폐를 단행하면서 붙인 명칭으로,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해 '상의하달식(top-down)'으로 규제를 일괄정리하는 방식이다. 기존의 건별, 상향식(bottom-up) 규제개혁과 달리 단기간에 대규모의 제도개선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잊혀졌던 '규제 기요틴'이 2015년, 우리나라에서 부활한 데는 박근혜 대통령의 영향이 컸다.

박 대통령은 그간 발언의 수위를 높여가며 일자리와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는 각종 규제를 반드시 철폐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혀왔다. 규제를 '암 덩어리' '원수'로 비유한 데 이어, 지난해 11월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 같은 규제들을 "한꺼번에 단두대에 올려 처리할 것"이라며 규제 단두대, 이른바 규제 기요틴 추진을 공식화했다.

이후 정부는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중앙회, 경영자총연합회 등 8개 경제단체에서 모두 153건의 규제기요틴 과제를 접수받았고, 지난 12월 이 가운데 114건을 선정해, 실제 개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의료분야 규제 기요틴 10개 과제, 내용은?

 

정부가 공개한 규제 기요틴 중에는 '의료·의료 인접분야' 과제 10건이 포함됐다.

정부는 투자·일자리 창출을 위한 개선과제로서 △경제자유구역내 투자개방형 의료법인 설립요건 규제 완화(보건복지부 소관) △메디텔 설립기준 완화(문화체육관광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조속 제정(기획재정부) △미용기기분류 신설(복지부)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 미래산업·기업혁신 유발을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의사-환자 원격진료(복지부) △디지털 헬스기기 등 융합신제품 선제적 인증제 개선(식품의약품안전처) △의료기관 진료기록 관리·보관방식 변경(복지부·미래창조과학부) △비의료인의 카이로플랙틱 및 예술문신 제공 허용(복지부) 등 4건의 과제도 풀어가기로 했다. 

아울러 시장 활성화를 위해 △한의사 현대의료기기 사용 및 보험적용 확대(복지부) △안전상비약 슈퍼판매 확대(복지부) 등을 추진키로 하고, 이를 가로막는 규제들도 모두 '단두대'에 올리기로 했다.

정부는 단기간내 대규모 규제개혁을 이룬다는 목표 하에 각각의 타임스케쥴도 마련해 둔 상태다. 일례로 한의사 현대의료기기 허용을 위한 규제개혁 데드라인은 올해 상반기다.

의료영역 '침범'…도전받는 의사들

문제는 정부가 선정한 기요틴 과제 중 상당수가 그간 '의료영역 침범' 논란을 불러일으켜 왔던, 그러나 이해당사자들 간 합의 불발로 오랫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해왔던 '뜨거운 감자'들이었다는 데 있다.

정부는 기요틴 과제 선정 과정에서 모두 5개의 '감자' 중 4개를 의사와 대척점에 있던 타 직역에 내어주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한의사 현대의료기기 사용 허용과 미용기기 분류 신설·비의료인 문신 허용·의사-환자 원격의료 허용 등이 의사가 빼앗긴 감자요, 안경사 타각적 굴절검사 허용이 의료계에 남은 감자다.

한의사 현대의료기기 사용에 관한 문제는 의료계와 한의계가 오랜시간 법정 다툼을 벌일 정도로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분야다.

한의계는 한방의 과학화와 국민 편의 증진차원에서 한의사도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요구해왔지만, 의료계는 양한방으로 이원화돼 있는 국내 의료체계를 흔드는 일인데다 전문성 부족으로 인한 판독 오류, 그로 인한 질병발견의 지연과 악화, 의료비 낭비 등의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반대입장을 고수해왔다.

그러나 정부는 이번 기요틴 과제에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포함시켰다. 또 이 같은 전제 하에 국민의 요구 등을 반영해 사용 지침을 마련하며 기기별 유권해석을 통해 한의사가 사용할 수 있는 진단·검사 기기를 정해나가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국민 건강 위협" 전문가 경고 무시

덧붙여 정부는 성장산업을 위한 미용업 육성을 위해, 미용기기를 새롭게 정의하고 미용목적으로 사용하는 기기 중 안전성이 입증된 기기를 의료기기가 아닌 미용기기로 분류해 비의료인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른바 '미용기기 분류 신설'.

분류 신설 문제 또한 미용업계와 의료계간 첨예한 의견대립으로, 수년째 결론을 내리지 못한 과제다.

미용업계는 안전한 기기라면 비의료기기로 분류해 비의료인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의료계는 미용업소에서의 무분별한 시술로 인해 부작용이 발생한 사례가 적지 않다며 국민건강을 고려할 때 '해금'은 불가능하다고 맞섰다. 안전한 사용을 담보할 수 없는 상태에서, 비의료인들의 미용시술을 허용하는 것은 정부가 유사의료행위를 조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논리다.

비의료인의 카이로프랙틱과 예술문신을 허용하겠다는 방안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논란거리였다.

의료계는 그간 유사 의료행위를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들 방안에 대해 반대의견을 밝혀 온 바 있다. 특히 문신은 진피침습이 이뤄지는 명백한 '의료행위'로 부작용이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예단만으로 이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대해서도 의료계의 주장을 인용치 않았다.

의사파업이라는 극단적 사태를 불러올 정도로 의료계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던 의사-환자간 원격의료 허용에 대해서도 기존의 입장을 고수. 단두대에 올릴 개선 과제로 꼽았다.

정부는 ‘의료 영역 침범’ 논란과 닿아있는 5개 규제 개혁 건의사항 가운데 안경사 타각적 굴절검사 허용에 대해서만 “국민 건강과 관련된 사항으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수용 불가 입장을 밝혔다.  

"일방통행식 의료정책 도 넘었다"

정부 발표 직후부터 의료계에서는 거센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대정부 투쟁이 본격적으로 재개될 전망이고, 일각에서는 면허 반납까지 불사해야 한다는 강경한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실제 규제 기요틴 발표 이후 대한의사협회를 시작으로 의료계에서는 정책 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의협은 "정부가 규제개선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미명 하에 비의료인의 무면허 의료행위를 조장하고, 의사의 고유 전문영역을 침해하는 비정상적인 정책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어 "국민건강과 직결되는 중요한 보건의료정책을 전문가들과의 소통없이, 정부가 정략적으로 결정한 일로 결코 인정할 수 없다"며 "이번 결정은 반드시 철회돼야 하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 이를 저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역·직역의사회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과 경기를 비롯해 시도의사회들도 잇달아 정부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개원의들과 전공의는 물론 의대생들도 정책 철회를 요구하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의협을 중심으로 한 의료계는 정부가 전문가단체의 반대에도 불구, 규제 철폐를 강행할 경우 전면 투쟁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복지부 “협의는 있어도 철회는 없다”

복지부는 "의료단체와 충분한 논의과정을 거칠 예정으로 의료계가 우려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정책 추진 철회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이다.

강민규 보건복지부 한의약정책과장은, 한의사 현대의료기기 사용과 관련 "사안이 민감한 만큼 내부 검토를 거쳐 구체적인 방안을 만든 뒤 의협과 한의사협회 등 이해당사자들과 충분한 논의를 거치겠다"며 "의료계가 우려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국무조정실 발표대로 올해 상반기까지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덧붙여, 정책 철회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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