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의료사고 처리 특례법 등 추진, 의료계·환자단체 이견 커 진통 예고
"배상제도 바꿔야" 의료배상공제조합 연구용역 돌입 등 대응 예고
[메디칼업저버 김지예 기자] 의료과실 사고에 의료진의 책임을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잇따르면서 의료계가 끓어오르고 있다.
의료계는 이 같은 판결이 필수의료를 위축시키고 있다고 지적하며, 의료사고에 대한 의료인 보호 정책 마련을 촉구했다.
정부는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을 서둘러 완성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료계와 환자단체 간 이견이 커 법제화에 진통이 예상된다.
이런 가운데 대한의사협회 의료배상공제조합이 의료사고 관련 민·형사 소송 분석 연구용역을 추진하며, 의료분쟁 관련 입법 대응 준비에 들어갔다. 이번 기회에 의료사고 배상제도가 개편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응급실 전공의 1년 차도 보상 책임..."누가 필수의료 수련하겠나"
지난 10일 경기도 광주에서 내과를 운영하는 A씨는 주의의무 위반 과실치사 소송 1·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아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며 탄원서 서명을 요청하는 글을 의사 커뮤니티에 올렸다.
A씨는 위풍선 시술을 진행한 환자를 추적관찰 하던 중, 환자의 통증 호소에 응급내시경으로 풍선 제거를 시도했다. A씨는 구두로 환자의 금식 여부를 확인했으나, 내시경 과정에서 위 속 음식물이 확인돼 시술을 급히 중지했다. 하지만 구토로 인한 흡인이 발생, 환자는 심폐소생술 후 상급병원으로 전원됐고 끝내 흡인성 폐렴 및 위천공으로 사망했다.
앞서 지난 6일에는 데이트폭력 피해자가 응급실에서 과다 출혈로 사망한 사건에 의료진과 병원의 공동배상 책임이 인정됐다. 마취통증의학과 1년 차 전공의였던 B씨는 응급실로 실려 온 환자에게 중심정맥관 삽입술을 하다가 동맥을 관통시킨 의료사고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은 "해당 시술 자체는 흔한 의료행위이지만, 대상 신체 부위가 자칫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쇄골 근처였기 때문에 B씨가 최선의 주의 의무를 기울여야 했다"며 B씨와 병원이 폭력 가해자와 함께 유가족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의료계는 일제히 반발했다. 의협은 "해당 시술들은 응급상황에서 치료 가이드라인을 따른 것"이라며 "이 같은 의료행위에도 유죄가 인정된다면 의료진들이 소극적인 진료로 일관할 수 있으며, 나아가 필수의료 기피를 심화시켜 그렇지 않아도 위기인 필수의료가 고사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특히 응급실 사고에 대해서는 1년 차 전공의가 높은 의료사고 배상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논란이 됐다.
의협은 "의료사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젊은 의사들이 어떻게 중증·응급의료를 수련할 의지를 가질 수 있겠느냐"며 "전공의 수련에 국가적 책임을 강조하는 정부는 의료사고 책임이 온전히 전공의에게 전가되는 이 상황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 의료사고 책임 배상은 전공의들이 필수의료 수련을 피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환자를 직접 진료·수술하지 않는 예방의학과의 전공의 지원율은 의료대란 전인 지난해 초 16.7%에 머물며 최하위권에 속했지만, 의료대란 후인 올해 2월 93.3%로 전공의 지원율 1위 과목으로 뛰어올랐다.
낮은 수가·소송 남발 사회분위기 원인, 정부 대책 진전 안 보여
낮은 수가 상황에서 수익을 추구하는 수련병원 현실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지난 14일 의료인력 추계기구 법제화 공청회에 참여한 단국대병원 권역외상센터 허윤정 교수는 "전공의는 피교육자 신분으로 병원 내 모든 의료행위는 교수의 감독 아래 이뤄진다. 단독으로 법적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며 "원가 이하의 수가로 식당과 장례식장을 넘어서는 매출을 만들어야 하기에 현재 병원에서 의료인들은 부품이 돼 소모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전공의가 의료사고의 책임을 지는 불합리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의료행위에 민·형사상 소송을 남발하는 사회 분위기와 과도한 형사처벌 및 민사배상도 문제로 지적됐다.
허 교수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시행한 기관 내 삽관술 수가는 4만 7000원인데 기관 삽관 후 사고 배상액은 5억원이다"며 "의료행위에 민·형사상 소송을 남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의사는 더 이상 생명을 다루는 분야에 종사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쓴소리를 뱉었다.
이어 "고의나 중과실이 없을 경우 형사책임을 면책하거나 민사배상 상한선을 설정하고, 전공의에 '의료소송 면책 특례 조항'을 도입하는 등 보호책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정부는 지난해 말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한 의료사고에 대한 보상금 최대 상한을 기존 3000만원에서 3억원으로 올리겠다고 발표하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시행령·시행규칙 일부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또 필수의료 분야 전공의와 전문의를 대상으로 '의료사고 배상 책임보험‧공제' 보험료 지원하고, 보험 가입 시 형사소송 기소를 제한하는 '의료사고 처리 특례법' 제정 등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 내용이 담길 예정이었던 2차 의료개혁 방안 발표가 비상계엄 등으로 무기한 연기되면서 정책도 좀처럼 진전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의료개혁특별위원회는 최근 △(가칭)환자 대변인 및 국민 옴부즈만 시범사업 추진계획 △의료사고 배상보험‧공제체계 개선 방향 △의료사고 특화사법체계 구축방안 △공정한 감정체계 구축방안 추진계획 △의료사고심의위원회 운영방안 등 의료사고 안전망 강화 방안 등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안에 환자단체와 의료계의 이견이 커 시행까지는 진통이 예상된다. 의료계는 의료사고 배상 책임을 완화하고 국가가 일정 부분 이를 부담하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법조계와 시민단체에서는 환자의 권리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 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의료배상공제조합은 새 집행부 구성과 함께 의료사고 관련 민·형사 소송 분석을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 의료사고 배상제도의 개선 방향 모색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의료배상공제조합 대위원회 양동호 의장은 "과도한 소송과 배상에 필수의료가 무너지고 있지만 정부는 사실상 의료진에게 민사 배상을 전가하며 형사처벌 감면을 마치 의료진에 대한 특례처럼 보이게 하는 시혜성 정책만 내놓고 있다"며 "이번 연구용역을 통해 향후 정부와 국회의 입법 논의에 대응하고, 대국민 홍보에도 박차를 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연구용역은 2025년 2월부터 5월까지 진행되며 △의료분쟁 형사소송 판례 비교 분석 △의료분쟁 민사소송 판례 비교 분석 △의료 분쟁 시 안정적 의료환경 조성을 위한 민사 배상 방안을 다룬다. 연구비는 총 1억 원이 투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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