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원인 대비 교통사고 상대적 위험도 낮아
대한뇌전증학회 "1년 발작 없으면 면허 취득할 수 있도록 제안"

지난여름,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억울한 누명을 쓴 질환이 있다. 바로 '뇌전증'이다.부산 해운대에서 발생한 7중 추돌 교통사고를 낸 운전자가 뇌전증 환자라는 이유만으로 뇌전증은 교통안전을 위협한다며 여론의 질책을 받았다.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CCTV를 통해 뺑소니 사고로 최종 결론이 내려졌지만, 뇌전증 환자의 운전면허 발급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뜨겁다.이에 대해 학계는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뇌전증 환자들이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선 안 된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뇌전증 발작, 젊은 성인보다 사고 위험 낮아그렇다면 뇌전증이 다른 원인보다 교통사고를 유발시킬 수 있는 위험이 높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통사고에 대한 상대적 위험도는 뇌전증 발작이 다른 원인보다 굉장히 낮다. 이를 뒷받침할 과학적인 근거는 미국, 유럽 등에서 발표된 연구로 확인할 수 있다.2004년 미국 존스 홉킨스 의학대학원 Soham G. Sheth 교수가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운전 중 뇌전증 발작에 의한 사망률은 0.2%에 불과했다(Neurology. 2004;63(6):1002-1007.). 만성질환인 당뇨병, 심혈관질환 및 고혈압에 의한 사망률이 각각 0.3%와 4.1%인 점을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수치다.주목할 부분은 이러한 질환 외의 원인에 대한 사망률이 더욱 확연했다는 점이다. 알코올 남용 및 중독 때문에 사망까지 이어진 경우는 31%로, 뇌전증 발작 사망률보다 약 155배 많았다. 아울러 25세 미만 젊은 운전자의 사망률은 24%로 그 뒤를 이었다.뿐만 아니라 교통사고 원인에서도 뇌전증 발작이 다른 원인보다 더 위험하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치명적인 교통사고 원인은 알코올 남용 및 중독이 10만 명당 72.4명으로, 가장 심각한 위험요인이었다. 25세 미만의 젊은 운전자는 28.08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뇌전증 발작이 치명적인 교통사고로 이어진 경우는 10만 명당 8.6명으로, 알코올 중독 및 25세 미만 운전자보다 8배, 3.3배 낮았다.2004년 벨기에 교통국이 발표한 자료에서도 앞선 연구와 유사한 결과가 도출됐다. 뇌전증으로 인한 교통사고의 최대 상대 위험도는 1.8배로, 생리 중인 여성 위험도인 1.6배와 비슷한 수치였다. 이는 25세 미만 젊은 남성의 위험도가 7배로 가장 높았던 점과 비교하면 약 4분의 1 정도 낮다. 아울러 25세 미만 여성에서 3.2배, 75세 이상 노인에서 3.1배보다도 낮은 결과다.성균관의대 홍승봉 교수(삼성서울병원 신경과)는 "1년 이상 발작이 없는 뇌전증 환자는 60세 이상 정상인뿐만 아니라 가장 젊은 20대 운전자에 비해서 교통사고의 상대적 위험도가 더 낮았다"면서 "약물치료로 발작 증상이 잘 조절된 뇌전증 환자들은 정상생활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모든 발작이 사고로 이어지지 않아

나아가 4일 열린 미국간질학회(AES) 연례학술대회 포스터세션(Poster 2.276)에서는 뇌전증 환자가 운전 중 견딜 수 있는 발작이 짧게 나타나면 교통안전에 문제없다는 연구가 공개되면서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미국 예일 의과대학 Hal Blumenfeld 교수는 "운전 중 발작이 길게 나타났을 때만 교통사고 위험이 높았다"면서 "이번 결과는 의사가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는 환자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구팀은 뇌전증 환자 16명을 대상으로 1~10시간 운전 시뮬레이션을 받는 동안 나타난 발작 및 교통사고 위험을 평가했다. 이들은 운전 중 발작이 있어도 견딜 수 있다면 운전을 계속하도록 주문받았다.

최종 결과, 충돌하지 않은 군의 평균 발작 시간은 23초였다. 반면 사고가 난 군에서 발작이 평균 80초간 이어져, 발작 시간이 길어질수록 교통사고 위험이 유의미하게 높았다.

Blumenfeld 교수는 "평균 발작 시간과 운동기능 손상 또는 의식장애가 운전 시 안전에 영향을 준다"며 "모든 뇌전증 환자의 운전면허 취득을 금지해선 안 되며, 운전해도 안전한 환자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 스탠포드의대 Robert Fisher 교수는 외신(medscape)과의 인터뷰에서 "뇌전증 환자가 운전 중 사고를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불평등한 차별을 받아서도 안 된다"면서 "뇌전증은 교통안전을 위협하는 위험요인이 아니며, 일정 기간 발작을 조절할 수 있다면 사고 위험이 낮다고 봐야 한다"고 피력했다.

홍 교수는 "이번 연구는 운전 시뮬레이션을 이용한 운전 중 발작 발생 시 교통사고의 위험을 처음으로 분석한 연구다"며 "운전 중 모든 발작이 사고를 유발하지는 않음을 밝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1년간 발작 없으면 면허 취득할 수 있도록 제안"

이렇게 뇌전증은 다른 원인과 비교해 교통사고에 대한 위험도가 높지 않으며, 모든 발작이 사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과학적인 근거도 탄탄히 다져졌다. 이에 외국에서는 뇌전증 환자의 운전면허 취득 기준을 최소 무증상 기간으로 제시해 운전을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운전면허 취득기준에서는 뇌전증을 결격 사유로 규정한 상황이다.

홍 교수는 "미국 대부분 주에서는 뇌전증 환자가 최소 3~6개월 동안 증상이 없으면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면서 "아울러 기간 규정 없이 의사 소견서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지역도 있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미국 총 51개주에서는 운전면허를 받는 데 필요한 최소 무증상 기간으로 △3개월(12개주) △6개월(23개주) △1년(4개주) △의사 결정에 따름(12개주)을 내세우고 있다.

그는 "뇌전증 환자가 6개월에서 1년 동안 발작이 없었다는 것은 치료가 잘 됐다는 의미"라며 "이에 대한뇌전증학회는 1년간 발작이 없으면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도록 경찰청에 제안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수면 중에만 발작이 나타나는 경우와 의식장애 없이 손발을 가볍게 떠는 등 운전을 방해하지 않는 경미한 단순부분발작 환자도 면허를 받을 수 있도록 제언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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