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응답하라 의료윤리

 

 

 

 

 

 

마거릿 랜든(Margarat Randon)의 작품 '왕과 나(The King and I)’의 왕의 노래에는 인상적인 구절이 나온다.

"나 어렸을 적 세상은 명료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더욱 어려워진다네."
'좋고 싫음'보다 '옳고 그름'의 구분이 비교적 쉽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만 어린 시절의 무지가 아니라면, '윤리'라는 것은 생각보다 쉬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명징성(明澄性)과 실용성
신체적·정신적 상해를 입어 약해진 상대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데 불편부당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의료윤리의 보편적 원칙이다 (참조: 의료윤리의 4대 원칙). 의과대학에서 가르치고 국가가 인증하는 의사 배출 국가고시의 시험문제로 출제돼 평가하는 개념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살아 있는' 의료 윤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우리와 만나는가.

명징하다는 말은 본래 심상이나 개념을 구체적으로 사물화해 뚜렷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현 시점의 우리나라 의료체계 안에서 절실하고 유용한 의료윤리의 기본 요건은 날카롭게 재단된 명징성이다. 보편타당한 선(善)으로서가 아니라 대내외적 판단의 기준으로서, 행위의 근거로서 정교한 구체성이다. 전공의의 시점에서 구성된 다음의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 병동 주치의인 L은 오늘도 스테이션에서 처방을 내던 중 친절한 제안을 받았다. 따뜻한 커피잔을 내밀며 "선생님, 힘드시죠?"라며 격려하는 그는 모 제약회사의 직원. 종이컵에는 제약회사의 로고 스티커가 붙어 있다. 함께 쥐어준 직원의 명함과 볼펜들. 어디까지가 시장경제의 홍보와 광고활동이며 어디서부터 사회적으로 비판받아야 하는 리베이트의 시작인가?

· 주치의 L은 몇 주째 골머리를 앓고 있는 고민이 있다. 치료를 제대로 따라주지 않고 처방한 매 투약 및 처치마다 거부하거나 협조하지 않는 노인 환자를 맡게 된 것. 주관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환자는 가족들도 포기한 상태다. 하지만 환자가 앓고 있는 말기암은 수술적 치료로 증상을 다소 완화하고 짧은 생명연장을 기대해볼 수 있지만 환자 본인은 완강히 거부하는 상황. 가족들은 환자에게 겁을 주고 화를 내서라도 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이 순간에도 각 병원의 전공의들이 수없이 마주치는 일들이다. 이러한 상황들이 교과서가 제시하는 알고리듬을 벗어났다고 해서 진지하게 사유할 가치가 부족한 사안들일까? 그저 개인의 양심에 맡기기에는 사회적 책임이 날로 더해지는 현실에 대해 보다 구체화된 합의가 요구되고 있다. 의료 '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근거(evidence)로서의 의료윤리다. 사회 구조가 격변하고 기술이 첨단화됨으로써 탄생하는 새로운 현안들에 대처할  실용성 없이는 의료윤리는 책장 속의 죽은 경구이기 때문이다.

자율성 그리고 미학
그러나 윤리, 도덕과 같은 관념을 우리가 멀게, 어렵게 느끼는 것은 현실적으로 용이한가의 측면보다 그것들로 인해 유발될까 두려운 부담과 과중한 책무의 원인이 더 클 것이다. 하지만 '규칙'과 '법'으로 가기 이전의 '윤리'는 사실은 그 대상자를 자유롭게 하는 도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의료인의 자율성과 주체성이 사라진 의료윤리의 현실적 약화 혹은 부재는 결국 타의적으로 '도가니법' '아청법'과 같은 강제성을 강요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짚어볼 것은 '의(Medicine)'가 가지는 특수성과 관계된 의료윤리의 필연적인 미학이다. 의학과 의료를 포괄하는 이 개념은 기원전부터 인간 고유의 윤리적 이상형을 제시하고 있었다. 약자를 돕고 구원하는, 절대자 이외의 위대한 존재로서의 의사라는 이미지는 무겁다 해서 벗을 수 있는 굴레가 아니다. 어쩌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가장 아름다운 상호작용의 근거로서의 의료윤리가 명징성과 실용성, 자율성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구현되는 날을 꿈꾼다.
 

*참조: 자율성 존중의 원칙/선행의 원칙/악행금지의 원칙/정의의 원칙
 

저작권자 © 메디칼업저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