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적(Pragmatic) RCT 연구 중요성 대두…등록사업·의료기록 등 이용해 RCT 진행
국내 전문가 "우리나라 실용적 RCT 할 수 있는 최적 조건 갖췄다"

과학적인 근거에 기초해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를 제공해야 한다는 '근거중심의학(evidence of medicine)'. 1990년대 초 그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임상에서는 객관적인 근거를 쌓고자 무작위 임상 연구(Randomized Clinical Trials, RCT), 관찰연구 등이 진행돼 왔다. 이 중 RCT는 높은 수준의 과학적 근거가 된다.그러나 기존의 실험적(Explanatory) RCT는 통제된 조건 하에 시행되기에 환자 모집 또는 제외 기준이 까다롭다. 때문에 새로운 치료제 또는 의료기술의 효능을 평가할 수 있지만, 환자를 통제하지 않는 실제 임상에 그 결과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같은 제한점을 해소하고자 리얼월드, 빅데이터 기반 연구 등이 이뤄지고 있으나 이 역시 수집된 환자 예후 데이터를 관찰하는 정도다.이에 학계에서는 병원 전자의료기록(EMR) 또는 등록사업(registry)에 모집된 환자 자료 등 실제 임상 데이터를 활용해 RCT를 진행하는 '실용적(Pragmatic) RCT'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국내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실용적 RCT를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구축돼 있어, 잘 활용한다면 전 세계 '임상연구 1등'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실험적 RCT-리얼월드 연구, 그 중간의 '실용적 RCT'실용적 RCT는 실험적 RCT와 리얼월드 연구 사이에 있는 연구라고 볼 수 있다. 실험적 RCT처럼 엄격한 기준에 따라 환자를 모집하지 않지만, 이미 구축된 데이터 즉 실제 임상 데이터를 토대로 환자들을 무작위 분류하는 방법으로 연구가 시행된다. 이에 실험적 RCT처럼 모든 환자에게 모집 기준을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울산의대 박덕우 교수(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는 "미국은 (메디케어 또는 메디케이드 등의) 의료보험 수혜자에게 연구자들이 진행하고자 하는 연구 디자인과 목적, 필요성 등을 정리해 이메일을 보내거나 짧은 동영상을 보여준다. 관심 있는 환자는 전자문서(e-form)에 동의하면 되며, 동의 후에는 자동으로 환자들이 무작위 분류된다"며 "때문에 환자 모집부터 무작위 분류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모집 기준이 엄격하지 않아 실용적 RCT는 환자에게 위해가 되는 연구를 할 수 없다. 실험적 RCT는 새로운 치료제 또는 의료기술의 효능을 위약 또는 대조기술과 비교한다면, 실용적 RCT는 기존 치료와 새로 도입된 치료의 효과를 실제 임상에서 비교·분석하거나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가 무엇인지를 찾는데 목적을 둔다.예로, 아스피린을 복용 중인 환자는 심혈관질환 예방을 위해 고용량을 복용해야 하는지 또는 저용량이 적합한지 등의 연구를 디자인할 수 있다. 또는 치료 순응도 개선에 환자 대상 교육이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연구도 실용적 RCT에서 가능하다.실용적 RCT는 실험적 RCT를 거쳐 이미 임상에서 활용하고 있는 치료제 또는 의료기술의 효능 및 경제성 등을 평가하기에, 연구 결과는 정책이나 가이드라인에도 반영될 수 있다.실용적 RCT 핵심 단어…'대규모'·'저비용'·'단기간'실용적 RCT의 최대 장점은 '대규모' 환자를 대상으로 '단기간' 내에 연구를 완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연구에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실용적 RCT에 대한 논의의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TASTE 연구는 이 같은 장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N Engl J Med 2013;369:1587-1597). 스웨덴 SCAAR 등록사업에 모집된 ST분절상승 심근경색(STEMI) 환자를 대상으로 혈전이 있을 때 경피적 관상동맥중재술(PCI) 전 혈전흡입술을 해야 할지를 무작위로 분류해 평가했다. 그 결과 PCI 전 혈전흡입술 시행 여부에 따른 사망률 차이는 없었다.주목할 점은 약 7000명이라는 대규모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가 진행됐으나 결론을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2년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환자 1인에게 50$(한화 약 5만 7000원)를 지급, 연구 진행 시 발생 비용(incremental cost)은 약 30만$(한화 약 3억 5000만원)다. 이에 학계는 TASTE 연구 디자인을 혁신적이라고 평가하면서 향후 임상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강조했다.연세의대 김현창 교수(세브란스병원 예방의학과)는 "실용적 RCT가 실험적 RCT를 대체하진 않겠지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줄 수 있다"며 "앞으로 실용적 RCT로 할 수 있는 연구 아이템이 쏟아질 것이다. 실험적 RCT만으로 임상에서의 궁금증을 모두 확인할 수 없으므로 실용적 RCT가 증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우리나라 '단일 건강보험 체계'…실용적 RCT에 '최적화'

국내 학계에서는 실용적 RCT가 우리나라에 최적화된 연구 디자인이라고 평가한다. 우리나라는 전 국민 단일 건강보험 체계로,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국민들의 의료 데이터가 모이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는 건보공단 또는 심평원 자료를 통해 환자가 복용한 치료제, 입원 여부 등에 대한 정보를 모두 알 수 있다. 전 국민 의료기록이 모니터링된다"며 "때문에 환자가 병원에 방문할 때마다 일일이 예후를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실용적 RCT를 잘할 수 있는 국가적인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 이를 잘 활용하면 우리나라가 전 세계 임상연구 1등을 할 수 있다"고 피력했다.

김 교수는 "대규모 등록사업이나 코호트가 잘 구축돼 있으면 실용적 RCT를 시작하기 쉽다"며 "우리나라는 단일 건강보험 체계라는 점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실용적 RCT를 진행하기 훨씬 유리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개인정보보호법'에 발목 잡혀…"좋은 시스템이 있는데 시작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실용적 RCT를 하기 위한 걸음마조차 떼지 못한 실정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개인정보' 문제다. 개인정보보호법이 강화되고 개인의료정보가 민감한 개인정보로 여겨져 환자들의 연구 참여 동의를 받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실용적 RCT 진행 전 환자들의 연구 참여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를 위한 링크를 환자에게 보낼 경우, 링크를 열기 위해선 환자의 주민등록번호, 의료 식별번호 등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링크에 주민등록번호, 의료 식별번호 등을 연결하는 것만으로도 반대한다"며 "우리나라는 실용적 RCT를 할 수 있는 좋은 시스템이 있지만 미국이나 유럽보다 연구를 시작하기가 힘들다. 현재 연구를 시작하고 싶어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병원 임상시험심사위원회(IRB) 심의도 실용적 RCT의 발목을 잡는다. 현재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생명윤리법)'에서는 IRB에서 연구 계획서, 서면동의 방법 등을 심사하도록 하고 있다. 실험적 RCT라면 이 과정을 거친 뒤 최종 동의를 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연구가 진행된다

그러나 실용적 RCT는 환자에게 위해가 되지 않는 연구를 하며, 병원에서 일상적으로 수집하는 의료기록을 추적관찰한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실용적 RCT에 대한 IRB 심의 시 환자 동의서 면제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IRB 심의를 하시는 분들이 아직 실용적 RCT에 대한 인식이 크지 않다. 실용적 RCT는 일상적으로 수집된 데이터를 활용하기에 극단적으로는 환자 동의서를 면제할 수도 있다"면서 "아직 실용적 RCT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연구자 수가 적어 연구가 활성화되지 않아, IRB 심의에서 실용적 RCT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국내에서 실용적 RCT가 활성화되기 위해선 많은 연구자가 연구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분석된다. 

김 교수는 "새로운 연구의 장점을 인식하는 연구자가 많아야 연구를 시도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 법규 등이 따라올 것이다. 아무도 연구하겠다고 요청하지 않으면 변할 리 없다"며 "연구자들이 실용적 RCT의 필요성을 인지하는 것이 가장 먼저"라고 강조했다.

한편 대한심장학회는 지난해와 올해 열린 학술대회에서 실용적 RCT에 관한 논의 세션을 마련해 학계의 큰 관심을 받았다. 올해 추계학술대회에서는 대한심혈관중재학회 차원에서 진행한 K-PCI 등록사업을 활용해 실용적 RCT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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