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욕설·폭행·칼부림 다른 환자안전까지 위협...폭행방지법안 제정 시급

# 2008년 6월, 대전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모 의과대학 비뇨기과 교수가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조사 결과 가해자는 같은 해 1월 해당 교수에게 진료를 받았던 환자 A씨로, A씨는 치료 직후부터 수차례 오진을 주장하며 병원을 찾아가 행패를 부리고 보상금을 요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병원관계자들은 경찰이 용의자를 특정하기 이전부터 해당 환자를 범인으로 의심했을 정도로 A씨의 난동수위가 높았다고 증언했다.

# 2008년 11월과 2012년 8월, 2013년 2월과 7월에도 각각 진료 중인 의사가 환자가 휘두른 칼에 찔려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응급실에서 근무 중이던 의사나 전공의들이 환자에게 폭행당한 사례도 2008년 이후 언론에 알려진 것만 4건에 이른다. 해당 의사들은 빨리 치료를 해주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환자들에게 폭행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료인 폭행사건, 왜 자꾸 반복되나

▲지난달 27일 발생한 창원 전공의 폭행사건. 가해자는 진료내용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해당 의사를 무차별 폭행한 것으로 알려졌다(방송화면 캡쳐)

최근 의사 폭행 사건이 또 다시 재발하면서 의료계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의료계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오전 경남 창원의 한 종합병원에서 환아 보호자가 이 병원 전공의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폭행을 당한 전공의는 전치 4주의 상해를 입었으며 현재 극도의 스트레스를 호소, 정신과를 동반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조사 결과, 가해자는 해당 전공의에게 진료를 받았던 딸 아이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드러났다.

의료계는 연일 계속되는 의사 폭행 사건에 강한 분노를 표하면서, 보건의료인 폭행방지법안의 조속한 처리 등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의사 폭행 사건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한의사협회에 따르면 2008년 이후 언론에 보도된 의사 폭행 사례만 모두 9건. 상당수 병원이 폭행사건의 노출을 꺼려 사건을 이슈화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진료현장에서의 의사 폭행 사례는 이를 휠씬 뛰어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의사 폭행 왜 자꾸 반복될까? 의료계는 제도적·법적 보호장치 미비를 가장 큰 이유로 꼽고 있다. 환자나 환자 보호자가 진료현장에서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의사를 보호하거나, 가해자를 제재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 보니, 폭행사건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진료 중인 의사 때려도 '단순 폭행'...무관심이 폭력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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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보건의료인에 대한 폭력 행위는 별도의 금지·처벌 규정 없이 형법에 따라 일반 폭행사건과 동일하게 처리되고 있다.

위법행위에 따라 가해자에 △폭행은 2년 이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 벌금 △협박은 3년 이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 벌금 △업무방해는 5년 이하 징역 또는 1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

다만 응급실에서 보건의료인에 폭행을 행사한 경우에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5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별도의 규정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외국의 사례는 어떨까? 미국 응급전문간호사협회 등에 따르면 미국 대부분 주에서 응급실은 물론 진료실에서 발생한 보건의료인에 대한 폭력행위를 중범죄로 간주하고,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두고 있다.

앨라배마 주는 의료인에 대한 폭력을 최고 7년의 징역을 받을 수 있는 중대범죄인 2급 폭행죄로 분류하고 있고, 워싱턴·애리조나·콜로라도 주 등에서도 의료인 폭행을 특정범죄로 가중 처벌한다. 인디아나 주는 업무를 수행 중인 의료인에게 상해를 입힌 경우 D급 중범죄인 흉악 범죄로 다뤄 매우 강력히 처벌하고 있다.

충남의대 유인술 교수(충남대병원 응급의학교실)는 "외국은 의사 등 보건의료인에 폭력을 행사하는 사고가 발생하면 무조건 현장체포, 형사처벌감"이라며 "이는 진료 중인 의사에 대한 폭력을 단순폭력이 아닌, 다른 환자들에게까지 중대한 피해를 입히는 심각한 범죄행위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우리나라도 응급실 폭력행위에 대해서는 가중처벌하도록 법률로 규정하고 있으나, 경찰의 소극적인 태도로 실제 법이 집행되는 사례는 드물다"며 "응급실을 포함한 진료현장 전반에 보건의료인에 대한 폭행행위를 금지하고, 위반시 엄격히 처벌하도록 법 개정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료현장 폭력 '사각지대'...병원 노력만으론 '역부족' 

진료현장에서 의사를 보호할 만한 장치가 마땅치 않다는 점도 문제다. 의료계 등에 따르면 미국과 다수의 유럽국가 는 보호자의 응급실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으며, 싱가포르는 아예 종합병원 응급실에 경찰초소를 두어 폭력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일부 병원에서 응급실 등에 보안요원을 배치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으나, 대부분 사설업체와의 계약을 통해 경비를 요청하는 형태다 보니 적극적인 사건 개입을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다.

유 교수는 "병원에 고용된 보안·안전요원 대부분이 계약업체에서 나온 파견인력이다 보니 환자를 제지할 수 있는 아무런 권한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서 "환자와 잘못 접촉했다가는 쌍방폭행으로 고소를 당하는 판국이니 적극적으로 물리적 대응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폴리스콜' 도입 등 자구 노력도 이어지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법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게 의료계의 지적이다.

폴리스콜은 기존의 병원-경찰 핫라인과 유사한 개념으로, 병원 응급실 등에 비상벨을 설치, 폭력상황 발생 시 이를 누르면 곧바로 경찰이 출동하는 시스템이다. 지난해 부산시에서 전국 지차체 최초 시 단위 사업으로 이를 도입했고, 현재 부산 온종합병원 등에서 운영하고 있다.

병원 관계자들은 폴리스콜 도입으로 경찰 출동이 빨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사건 발생 횟수가 줄어들거나 기존에 비해 보호조치가 강화됐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한다고 전했다. 근본적으로 폭력행위를 근절할 수 있는 대책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온종합병원 관계자는 "폴리스콜 도입으로 안정감이 얼마나 늘었느냐고 묻는다면 기존 대비 10% 정도"라면서 "사건의 빈도도 기존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환자에게 주는 경각심 또한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는 "근본적인 문제는 응급실이나 진료실에서 발생하는 폭력행위에 대한 법적 제재조치가 너무 미약하다는 것"이라면서 "처벌규정 등을 강화해 경찰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건의료인 폭행방지법 조속히 제정해야

대한의사협회와 소아청소년과의사회, 전국의사총연합 등 보건의료단체들도 이른바 보건의료인 폭행방지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고 있다.

이학영 의원과 박인숙 의원이 각각 내놓은 의료법 개정안이 그것. 이들은 모두 의료인에 대한 폭행과 협박을 진료방해 행위로 규정해, 처벌토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의료법상 진료방해 행위로 규정된 △의료용 시설·기재·약품 등 기물파괴·손상 △의료기관 점거행위와 동일하게 '의료인 폭행'을 진료방해 행위 중 하나로 규정해 엄히 처벌토록 하자는 게 골자다.

처벌의 수위는 조금 다르다. 이학영 의원의 의료법 개정안이 의료인에 대한 폭행 시 기물파손·의료기관 점거행위 등 기존 진료방해행위와 동일하게 '5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는 데 반해, 박인숙 의원의 안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의료인 폭행·협박 행위에 대한 처벌을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으로 더욱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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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무진 의협 회장은 "보건의료인 폭행방지법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보건의료인을 보호하는 목적 외에 진료받는 다른 환자들에 대한 보호장치의 역할도 하고 있다"며 "국회에서는 조속히 입법을 추진하고, 정부와 시민사회계에서도 제도적·문화적으로 서둘러 준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재윤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장 또한 "의료진이 본연의 의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며 "유사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의료행위 중인 의료인에게 폭행을 가하거나 생명을 위협해 진료를 방해하는 행위를 엄벌하는 법안을 즉각 마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의료진 설명부족도 분란의 원인..."신뢰형성 필요"

시민사회는 진료실 내 폭력의 원인 중 하나로 의료진의 설명 부족과 불친절이 꼽히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얘기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환자가 치료받고 간호 받아야 하는 공간이 폭행협박으로부터 안전한 곳이 돼야 한다는 생각은 의사, 간호사뿐만 아니라 환자도 마찬가지"라며 "다만 진료실에서 폭행·협박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의료인·의료기관 종사자와 환자간의 신뢰 형성"이라고 강조했다.

안 대표는 "환자가 자신이 존경하는 의료인 및 의료기관 종사자를 폭행하거나 협박할 리는 없을 것"이라며 "의료인과 의료기관 종사자가 환자의 입장이 되어 환자의 눈높이에서 환자가 궁금해 하는 것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응급의학회와 정부, 중앙응급의료센터, 법조계는 지난해 TF를 만들어 병원 폭력예방을 위한 응급실 근무자 매뉴얼을 만들고, 직접 응급의료 종사자들에게 교육하는 등의 작업을 진행했으나 세월호 사태의 여파로 잠정중단된 바 있다.

당시 매뉴얼에는 응급실 종사자로 하여금 환자의 상태와 진료의 과정을 충분히 지속적으로 설명해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폭력상황 발생 시에는 반드시 적극적인 법적 대응에 나서 환자의 여론을 환기하고 폭력사태의 재발을 방지하며, 병원은 의무적으로 법무팀을 마련해 이 같은 일을 전담하도록 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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