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제정 앞두고 기대감..."병원계 지원 없이는 실효성 담보 못해"

# 지난 2010년, 백혈병으로 투병 중이던 아홉살 정종현 군이 항암제를 투여받은 후 신체마비 등 이상증세를 보이다 열흘 만에 사망했다. 당시 정 군의 사망원인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긴 했지만, 과로에 시달리던 담당 전공의가 두 가지 항암제를 투여하는 과정에서 약물을 착각, 정맥에 넣어야 할 빈크리스틴을 척수강에 잘못 투약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렸다.

이후 빈크리스틴 투약오류로 인한 사망사고가 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이미 여러 건 존재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고, 해당내용이 '투약 주의사항'으로서 매뉴얼화돼 있었다면 종현이의 사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뒤늦은 후회들이 터져나왔다. 환자안전법 제정 논의의 시작이다.

더불어 환자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주 100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는 전공의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환자안전법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 법 제정을 목전에 두게 됐다. 종현이 사건 이후 4년 6개월 만의 일이다.

법 제정까지 남은 관문은 법제사법위원회의 자구심사와 본회의 의결로 단 2개. 여야 합의에 따라 해당 상임위원회를 통과한 상황이어서 특별한 이견이 없는 한 이르면 이달 임시국회, 늦어도 내년 2월 국회에서 관련 입법절차가 모두 마무리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환자안전법, 어떤 내용 담았나

환자안전법은 △국가차원의 종합적인 환자안전관리체계 구축 △자율보고를 기반으로 한 환자안전사고 보고·학습시스템 운영 △환자안전정보의 분석과 재발방지 방안의 개발·공유·학습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번에 복지위를 통과한 법안은 오제세 의원이 발의한 '환자안전 및 의료 질 향상에 관한 법률안'과 신경림 의원이 발의한 '환자안전 및 의료 질 향상 법안'을 병합한 안이다.

복지위는 환자안전에 초점을 맞춰 법안의 성격을 명확히 하자는 취지로, 법안의 명칭을 '환자안전에 관한 법률안'으로 정리했으며, 법안의 목적 또한 '환자안전을 위해 필요한 사항을 규정해 보건의료 질 향상과 국민건강 증진에 이바지한다'는 것으로 명확히 정했다.

'모든 환자는 안전한 보건의료를 제공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규정을 명문화, 환자안전을 환자의 권리로서 명시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환자안전을 위한 국가와 지자체, 의료기관의 책무도 명확히 적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로 하여금 환자안전과 의료 질 향상을 위한 시책과, 환자 안전활동에 필요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 추진하도록 했고, '보건의료기관과 보건의료인, 환자의 환자안전활동에 필요한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다'는 규정도 명문화해 사업 지원근거를 마련했다.

구체적으로는 보건복지부장관으로 하여금 5년마다 환자안전과 의료 질 향상을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해 시행하도록 했으며, 보건복지령으로 의료기관의 시설과 관리체계, 보건의료인의 안전활동 등을 규정한 환자안전에 관한 기준을 만들도록 했다.

환자안전기준 준수 의무...위반시 처벌규정은 삭제

보건의료기관과 보건의료인의 책무로는 환자안전과 의료 질 향상을 위해 국가가 하는 시책을 따르며, 환자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시설·장비·인력을 구비하고, 필요한 주의의무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 환자안전법 제정이 목전이지만 정부의 지원이 없이는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환자안전에 관한 기준을 준수하도록 했고, 일정 규모 이상의 병원급 의료기관은 환자안전예방을 위해 별도의 환자안전위원회를 설치·운영하며, 환자안전사고 정보 수집과 분석, 의료인과 환자·보호자 교육을 위한 전담인력을 두도록 했다.

환자안전사고 보고와 이를 근거한 환자안전사고 재방발지 대책마련에 관한 규정도 마련됐다.

법률안은 환자안전사고를 발생시켰거나 발생한 사실을 알게 된 경우 그 내용을 보건복지부장관에 보고토록 했다. '자율보고'가 원칙으로, 환자안전사고를 발생시킨 사람이 자율보고를 한 경우에는 의료법 등 관계법령에 다른 행정처분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도록 해, 보고의 실효성을 높이도록 했다. 아울러 모아진 정보는 사건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에 쓰도록 했다.

다만 기존 입법안들에 담겼던 각종 벌칙규정들은 복지위 심사과정에서 대부분 삭제됐다.

당초 입법안들은 제도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로 환자안전 전담인력 고용, 환자안전기준 준수, 전담인력 정기교육 등을 환자안전을 위한 의료기관의 의무로 규정하고, 이를 위반한 경우 과태료 등 벌칙에 처하도록 했었다.

하지만 법안 심의과정에서 의료계와 병원계에 과도한 부담을 지울 수 있으며, 제도의 조기정착을 위해서는 의료기관들의 자율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면서, 이같이 결론이 났다.

환자안전법 제정 코 앞...남은 과제는?

법 제정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환자단체와 학계는 환영과 기대의 뜻을 밝혔다. 나아가 환자안전법 제정이 실제 병원 내 환자안전 사고 예방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인 후속조치들을 이어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병원계와 의료계의 강한 환자안전법 실효성 담보수단으로 도입된 각종 벌칙 조항들이 삭제된 점은 아쉬우나, 모두의 관심 속에 국내 최초로 '환자안전'을 위한 법률이 마련된다는 데 의미가 크다"고 평했다.

안 대표는 "안전강화에는 규제가 뒤따르게 마련이나, 의료현실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라면서 "감염보고제도의 경우에도 자율보고를 원칙으로 했고, 초창기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으나 생각보다 많은 병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환자안전사고의 경우에도 자율보고와 보고자 보호장치가 맞물려 좋은 효과를 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환자안전연구회 김석화 회장(서울대병원 성형외과)은 "환자안전법 제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이 법에 근거해 무엇을 어떻게 해 나갈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환자안전의 핵심은 안전사고의 예방에 있다. 국가차원의 안전사고 예방체계 구축과 더불어, 실제 병원들이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번 환자안전법에는 전공의 수련문제가 빠져 아쉬움을 남겼다.

의료기관에 대한 정부지원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환자단체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안기종 대표는 "병원 내에서 환자안전사고 예방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이를 위한 재정과 인력이 적극적으로 투입돼야 한다"며 "제도 활성화를 위해, 참여 의료기관들에 대해서는 수가나 인센티브 등 적절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 법 제정 이후 하위법령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목소리를 정부에 적극적으로 전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공의 처우 개선 논외 아쉬움...후속 논의 기대

다만 환자안전 보장을 위한 또 다른 '열쇠'로 꼽혀왔던 전공의 처우개선 문제는 별 다른 소득 없이 마무리됐다.

법 제정의 계기가 되었던 종현이 사건의 배경에 전공의들의 열악한 근로환경이 자리하고 있고, 현장에서 환자들을 가장 많이, 가장 가깝게 접하는 전공의들의 처우를 개선해야 실질적인 환자안전 보장이 가능하다는 주장들이 있었지만, 국회 차원에서의 후속 논의 약속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앞서 이목희 의원은 지난 국정감사에서 종현이 사건을 언급하며, 전공의 처우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이 의원은 "전공의가 과중한 격무에 시달리다 잘못된 처치를 하게 된 것"이라며 "전공의 43%가 주당 100시간이 넘게 근무하고, 평균 4시간 안팎의 수면을 취하는 환경에서는 정상적인 진료와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열악한 수련환경으로 인해 의료사고의 위험성이 상존해 있다고 꼬집으면서 "전공의들이 의사로서 환자를 위한 진료와 치료를 할 수 있도록 근무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실제 우리나라 전공의들의 근무시간은 외국에 비해 턱없이 길다. 미국은 전공의 근무시간을 주당 80시간으로 제한하고 있다. 4주 기준으로 1주에 하루는 쉬어야 하며, 24시간 이상 연속근무 또한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영국은 전공의 근무시간을 주당 38시간으로 제한하고, 하루에 적어도 연속해서 11시간의 휴식을 가지도록 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전공의 근무시간을 주당 최대 80시간으로, 연속 근무시간을 36시간으로 제한하는 등 전공의 근무환경 개선책이 나왔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공의들의 증언이다.

안기종 대표는 "전공의 근로환경의 문제는 환자안전과 직결될 수 있는 만큼, 환자단체에서도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사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환자안전법 제정과 더불어 전공의 수련환경의 개선을 위한 작업들도 이뤄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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