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월급 동결에 펠로우만 늘고 거래처 대금결제는 밀리고...

▲ '의리(으리)'를 강조한 모 광고 장면

#A종합병원 지난해 나름대로 선방했다. 어렵다 하는 와중에도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가면서 흑자를 기록했다. 예비 사업비와 이익잉여금의 합산을 일컫는 고유목적사업준비금을 충분히 적립하고 이전에 쌓아둔 자금과 함께 600억원을 병원 재건축에 쓰기로 결정했다.

병원은 재건축 준비로 한창이지만, 직원들의 불만은 상당하다. ‘병원이 재투자를 하고 있으니 지켜봐달라’면서 임금 동결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항상 이해하고 희생만 하면 대체 언제 직원들에게 투자하는 것 이상의 대대적인 혜택이 돌아오는지 의문을 품고 있다. 

“인근에 대형병원이 속속 들어서면서 수년간 병원이 어렵다고 하고, 항상 기다려 달라고만 했습니다. 혹시라도 병원이 문 닫을까 봐 더 열심히 했지요. 아직 재건축이 완성되려면 한참 남았고, 투자대비 수익을 거두는 시점도 멀었다고 할 것이 뻔합니다. 대체 월급은 언제 오르나요?”
 

#B대학병원 근래 환자가 부쩍 늘었다. 공격적인 투자와 적극적인 연구 활동으로 경쟁병원 환자를 일부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주변 병원은 실제 경영난에 직면한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상대적인 만족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이나 스탭 모두 대형병원에 눌려있던 자신감도 일부 찾았다.

특히 환자가 늘어나면서 연구와 임상이 늘어났다. 글로벌 임상을 유치하는가 하면 해외학회 참여 기회가 늘어났다. 여러 업체들의 초청으로 해외학회 구연 발표도 늘었다. 덕분에 인력 부족에 허덕이던 일부 진료과에서 펠로우를 대거 뽑았다. 그러나 사기를 찾은 교수들과 달리 펠로우는 논문 쓰랴, 학회 회무 조수 노릇하랴 죽을 맛이라고 한다. 병원이 잘된다고 교수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그리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큰 좌절이다.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으로 늘어난 당직도 뒤집어쓸 판이다.

“언제까지 비정규직 신분을 유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병원이 잘된다고 해서 펠로우를 늘리는 데만 급급하지, 정규직 T/O가 난다는 이야기는 못들었습니다. 이 와중에 모 교수는 해외학회 갈 때 비행기 일등석, 최고급 호텔 아니면 안간다고 업체들에 요구하라니 말이 됩니까?”


#C중소병원 소위 ‘잘나가는 병원’ 대열에 들어섰다. 지역 내에서 입지를 굳히면서 병상과 검진센터 신축 계획도 세웠다. 여기에 추산된 예산은 아직 최종 확정되진 않았으나, 수백억원에 달한다. 의료계 주요 단체나 지역행사에서도 원장의 이름이 올라있고, 환자가 줄어 간신히 제자리를 지킨다는 다른 원장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러나 잘 나간다는 소문을 들을수록 거래하는 의약품, 의료기기, 소모품 등의 거래업체는 황당하다. 안되면 안 되는 대로 참아야 했지만, 잘되더라도 납품물품 대금을 기존 관행처럼 1년 이상 결제해주지 않는 탓이다. 이 병원 때문에 도산하는 업체가 생긴다는 웃지 못할 사연도 나왔다.

“잘 나가는 그 병원장에 일찌감치 결제 좀 부탁한다고 전해주세요. 6개월 이내 대금 결제 의무화에, 밀리면 이자 지급이라는 상식적인 제도 도입을 병원협회에서 반대했다더군요. 우리 같은 업체들도 같이 먹고 살아야지요.  그저 갑의 횡포로 착취해서 버는 돈 아닙니까?”


‘의리(으리)’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TV광고가 인기몰이를 하면서 글자 그대로 ‘을’에게도 ‘으리’ 있는 사회가 되길 기대하는 패러디가 봇물이다. 하지만 A, B, C사례에서처럼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병원의 직원, 펠로우와 거래 업체 등 잘 나가는 병원을 ‘갑’으로 둔 이들은 갖가지 고충을 안고 있었다.

병원 성장의 그늘 뒤에 이들의 묵묵한 희생이 뒤따르고 있지만, 전혀 공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병원이 안될 때도 그만큼 고통을 감수해야 하지만, 혹여 잘 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 일부 병원의 태도에 도무지 충성심을 발휘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물론 병원 원장, 이사장들도 할 말은 있다. 사례 중 한 원장은 “병원이 문 닫지 않고 흑자를 유지하기 위해 전방위로 뛰고 있다. 직원들은 병원 성장에 대해 같이 고민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월급 올려주고 좋은 직장이길 원한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원장은 “지금은 이익이 나더라도 재투자를 하고 지속가능성에 무게를 둬야 한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직원들이나 업체들에 충분히 월급도, 거래량도 늘어나게 되면서 동반성장을 할 수 있다. 병원이 문 닫으면 모두 실업자가 된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을’의 입장에서는 ‘갑’의 횡포일 뿐 지금 잘하지 못하면 나중에도 똑같다는 말을 강조하고, 다른 좋은 직장, 좋은 거래처가 없는지를 되물었다.

이들은 "어려울 때는 어렵다고 참았지만, 막상 잘 될 때는 주위의 부러움과 질투를 받으면서도 말 못할 고민이 많다. 어느 병원이든 단면만 보고 평가할 수는 없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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