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응답하라 의료윤리
내가 생각하는 의료윤리


최주현
대한전공의협의회
사무총장

의사들이 끼였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국가와 시장, 정부와 자본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다. 과별 지역별 세대별 직역별로 갈라진 의사들이 한목소리로 방향성을 잃고 어려움을 호소한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의사일진대 배운 것과 좋은 의사가 되는 것의 괴리는 해리슨과 심사 평가, 인센티브 기준만큼이나 멀고도 깊다.

인접국과 마찰이 있을 때마다 제기되는 국가 정체성 문제에서처럼, 한국 의사들도 제도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정책적 종속성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건국 이래 반세기 만에 급속도로 몸집을 키운 자본과 기업은 의료법인을 통해 의료업에 진출했고, 최근 영리병원, 원격의료 논란에서 보듯 정책 방향성을 스스로 설계, 제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역사적으로 어느 사회나 의사들이 보편적 전문성을 획득한 것은 의학 교육이 정비되고 의료 윤리가 확립되면서부터다. 그러나 한국 의사들은 전문성을 제대로 인정받기도 전에 국가가 설정한 의료 체계와 심사 평가라는 울타리에 갇혔다. 환자 쏠림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급성장한 대형병원들은 근근이 유지되던 개원가의 멸종을 부르는 듯하다. 급격한 변화에 의사들은 속수무책이다. 빠르게 좌절하고 쉽게 포기한다. 애당초 의사와 의료 행위가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의사 사회에 팽배하다.

의사와 같은 전문직의 위상은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한국 의사들은 건국 60년간 양질의 의료를 위해 힘써 왔다. 석학들을 배출했고 기술과 국민 건강 면에서 여타 선진국을 능가한다. 그런데 갈수록 직업적 자존감은 낮아지고 스승에 대한 존경과 동료애는 사라져간다. 최선을 다해 '하얀 거탑’을 쌓아 올렸건만 토대와 외피는 의사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개업하면 월 천만원’이라는 자조 뒤로 숨을 일이 아니다.

의료 윤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윤리라는 이름의 거울에 스스로를 비춰보고 어떤 모습으로 사회에 나갈지를 정하는 것이다. '거대한 전환’의 저자 칼 폴라니는 "계급의 힘은 구성원이 외부로부터 지지를 담보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적극적인 의미의 의료 윤리는 의사들이 사회적 정당성과 지지를 얻기 위한 전략이자 경로다. 윤리가 개인의 방패이자 갑옷이 돼야 한다. 아울러 개인 윤리뿐 아니라 집단의 윤리가 새로워져야 한다. 개인 윤리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집단 이익에 매몰된다면 소용이 없다.

폴 스타는 집단이 권위를 가지려면 '내부적인 합의의 문제’와 '대외적인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봤다. 국가적 목표와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 의사 개인과 집단이, 병원과 의원이 공유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정부와 자본 사이에서, 주어진 것이 아닌 제3의 길을 만드는 것. 백 번의 총파업보다 중요한 일이며, 내부적 합의를 통해 갈라진 물길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한시가 급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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