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의료윤리 - <8>

내가 생각하는 의료윤리

안상준
안산시
단원보건소
공중보건의

1947년 2차세계대전 직후, 인체실험에 관여한 23명의 독일 의사들과 과학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서 '인체실험대상자는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자발적 동의를 가지고 강요가 없는 가운데 스스로 실험 참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기본으로 하는 뉘른베르크 강령이 채택됐고, 그 이후 1947년 세계의사회(WMA)의 ‘제네바선언’과 1954년 ‘헬싱키선언’으로 생명윤리의 역사는 이어졌다.

그 당시 독일의 일부 의사들은 국익을 먼저 생각한다는 명분 하에 장애인, 정신질환자, 혼수상태의 환자들을 죽이는 히틀러의 계획에 동조했고,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던 유태인들을 대상으로 의학발전을 위한 인체실험을 진행했다. 전시 체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행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논리가 나치에 동참한 의사들의 판단에 바탕이 됐다.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으로 돌아와 보면 원격의료와 서비스산업의 선진화를 위한 법 개정을 두고 정부와 의료계의 공방이 치열하다. 그 중 본질이 좀 더 명확한 원격의료 문제에 국한해 살펴보면 주요 내용은 의사가 원격의료시스템을 통해 의료 접근성이 떨어지는 환자를 대상으로 진료할 수 있게 법을 개정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찬성 측 근거는 의료취약지역 거주자나 거동 불편자와 같은 대상에게 편리성과 만족감을 주는 것이 공익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이런 미시적 관점을 벗어나 거시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대한민국의 강점인 전자와 통신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원격의료가 활성화되면 경제마차를 이끄는 원동력이 될 것이고, 이를 통해 수많은 일자리 창출과 경제적 풍요를 기대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의견은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에 근거한 판단이라 생각된다.

한편 반대 측 의견으로 국토의 크기에 비해 의사의 분포가 조밀한 한국에서는 원격의료가 적합하지 않다는 등의 부수적 근거가 있으나, 핵심 논리는 올바른 진료란 의사가 환자를 직접 대면하고 시진, 촉진, 타진, 청진을 기본으로 하는 기술적 의료뿐 아니라, 환자와의 라포(rapport, 상담이나 교육을 위한 전제로 신뢰와 친근감으로 이뤄진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생활습관과 환경 및 감정, 정서상태 등을 고려해 총체적 인술을 펴는 것이 본질이자 지향점인데 원격의료는 이에 반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던 정의론이 가리키는 바람직한 삶을 근거로 생각한 듯하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듯, 2차세계대전 당시나 현재가 흡사하다고까지 하기는 힘들겠지만,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진행될 논쟁의 근본은 시장논리와 정의논리 사이의 시각 차가 아닐까 싶다.

최근 마이클샌델 하버드 교수가 집필한   ‘정의란 무엇인가’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 또한, 현재 미국에서 뜨겁게 진행 중인 시장과 정의 간의 소리 없는 치열한 전쟁의 중간 결과물이다. 이에 반해 국민소득이 미국의 절반 정도 되는 대한민국에서는 윤리와 같은 정의론보다는 시장경제논리가 더 주목받는 경향이 있다. 의료윤리에 대한 논의가 이제서야 시작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듯 시장논리가 지배적인 한국에서 시장으로부터 의료윤리만을 분리해 생각하는 것은 적합하지도 않을 뿐더러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의료 윤리의 4대 원칙 역시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의사가 생각했을 때 비윤리적인 처치를 환자가 원하는 경우, 환자의 만족감을 위해 자율성을 존중해야 하는가? 아니면 윤리라는 정의에 따라 거절해야 하는가(자율성 존중의 원칙, 악행금지의 원칙)? 그 사회의 정치권이나 의료를 시행하는 의료인에 따라서도 과도한 검사에 관한 판단이 다를 수 있는데, 환자에게 그리고 건강보험공단 재정에도 해악일 수 있다는 경제논리와 정당한 의학적 판단을 기반으로 한 진료행위라는 정의 사이에서 온도차가 있을 수 있다(정의의 원칙).

거시적인 국가 차원에서든 미시적인 개인의 차원이든, 의료 윤리가 말하는 정의와 시장경제 논리 사이의 보이지 않는 싸움은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 의료 윤리의 본질과 성격상, 시장이 배제돼야 가장 이상적인 결과가 나오겠으나, 사회가 탁상공론의 장은 아닌 만큼, 시장과 의료윤리 사이의 접점을 찾아야 한다. 시대적 패러다임에 따라 결과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선택이라면 그것을 따르는 것이 맞지 않을까? 단, 중우정치나 포퓰리즘의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미국의 정치철학자인 로널드 드워킨이 말하는 인간의 존엄(dignty), 자존(self-respect), 진정성(authenticity)을 기반으로 하는 진정한 자유를 따르는 지혜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의료윤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성급히 정의내리고 규정지어 실용성을 추구하기 전에 의료윤리와 시장의 균형점은 어디일까에 대한 고민이 전제돼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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