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뇌전증협회·대한뇌전증학회, 세계 뇌전증의 날 기념식 11일 개최
낙인감·사회적 편견 큰 문제…뇌전증 관리지원법 입법 촉구
[메디칼업저버 손재원 기자] 뇌전증 환자에 대한 인식 개선을 넘어 사회적, 제도적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한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제언이 나왔다.
한국뇌전증협회는 대한뇌전증학회와 공동으로 11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세계 뇌전증의 날 기념식 및 세미나를 열고 뇌전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와 정책 마련 필요성을 알렸다. 매년 2월 두 번째 월요일은 국제뇌전증협회(IBE)와 국제뇌전증퇴치연맹(ILAE)이 공동 제정한 세계 뇌전증의 날이다.
한국뇌전증협회 김흥동 회장(성균관의대 소아청소년과 석좌교수)은 "뇌전증은 치매, 뇌졸중과 함께 3대 신경계 질환에 속하고 장기간 직접적인 의료 지원이 필요한 질환"이라며 "환자가 겪는 고통이나 사회적 편견에 비해 정부의 도움이 미약하다"고 지적했다.
소아청소년 뇌전증 환자, 낙인감 겪으며 삶의 질 저하
국내 뇌전증 환자는 약 37만 명으로 추산되고, 타 질환 대비 환자가 자신의 병력을 밝히기 쉽지 않은 질환으로 꼽힌다. 과거 '간질'로 불리며 형성된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부정적 낙인 효과가 강하기 때문이다.
강동경희대병원 윤송이 교수(소아청소년과)는 "뇌전증은 만성적인 신경질환이기에 환자는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어려움을 겪는다"며 "게다가 뇌전증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차별과 낙인감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뇌전증 환자가 겪는 신체적 어려움에는 발작 시 예상치 못한 낙상이나 부상 위험 등이 있다. 특히 과도한 스트레스나 피로는 발작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어 뇌전증 환자가 일반인 대비 취약한 부분이다.
정서적 어려움의 경우, 주변인의 잘못된 인식으로 인한 편견과 차별, 뇌전증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한 소외감, 자존감 저하나 우울감, 발작에 대한 불안감 등이 있다.
터키에서 이뤄진 선행 연구에 참여한 청소년 뇌전증 환자 약 50%는 높은 수준의 자아 낙인감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과도한 보호를 받았다고 답한 경우도 50%가량 됐다.
윤 교수는 "뇌전증 환자의 낙인감은 뇌전증을 숨기려는 행동이나 미래 직업, 삶에 대한 걱정 등으로 예측할 수 있다"며 "낙인은 뇌전증 환자의 자아존중감을 저하시키고 불안이나 우울 등 심리적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거나 사회적 고립을 야기해 삶의 질을 낮춘다"고 설명했다.
낙인감은 크게 △내면화된 낙인 △대인관계에서의 낙인 △제도적 낙인 등으로 분류된다. 여러 선행 연구를 보면 뇌전증 환자 본인이 질환에 대해 잘 모를수록 낙인감이 심했다. 환자의 어머니가 타인에게 질환을 숨길 경우에도 낙인감이 심하다는 결과가 보고됐다. 이는 질환에 대한 인지도와 낙인감 간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인구학적 변수로는 미혼, 경제적 빈곤, 낮은 연령대 등이 높은 수준의 낙인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다변량 분석에서는 발작을 처음 시작한 연령대가 낮고 경험한 발작 횟수가 많을수록, 발작으로 인한 부상 정도가 심할수록 낙인감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윤 교수는 "소아청소년 뇌전증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18.3%가 임상적으로 유의미한 정서적, 행동적 문제를 보였다"며 "소아청소년 뇌전증 환자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부모의 인식이 청소년 자녀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도 공유됐다. 부모로부터 낙인감을 느낀 청소년 뇌전증 환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 대비 여러 증후군 척도 점수가 높았고, 외현화나 사회적 문제를 경험할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사회적 어려움의 경우, 인간관계 형성이나 생활 환경 내 응급처치 방법 부족, 학내 지원 시스템 부족, 가족관계 부담감 증가 등이 제시됐다. 학교 차원에서는 뇌전증과 관련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학습 보조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윤 교수는 "심리 상담 등 학생 개인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고 사회적 인식도 개선해야 한다"며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거나 양방향 교육,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실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교육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뇌전증 환자에 대한 고용주·동료 인식 개선 필수
구직이 필수인 성인 뇌전증 환자에게는 고용주와 동료 노동자의 인식 개선이 중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강동경희대병원 신원철 교수(신경과)는 "뇌전증 환자는 스스로도 위축되지만 직장에서도 고용주나 동료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과 위화감을 느끼기 쉽다"며 "실제로 임상 현장에서 뇌전증으로 인한 입원이나 치료 사실을 숨겨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한다"고 밝혔다.
선행 연구를 보면, 뇌전증 환자가 본인의 치료 사실을 공개한 경우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비율은 55%에 달했다. 같은 연구에서 자신의 병을 숨긴다는 답변은 70%를 넘겼고 친구들에게도 공개하지 않는다는 답변 역시 50% 이상으로 나타났다.
뇌전증은 뇌 신경세포 일시적 이상으로 인한 뇌질환의 일종이지만, 유전적 질환이나 정신질환, 감염성 질환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환자의 70% 이상 일상생활이 가능하지만 뇌전증을 불치병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사회적 인식 미비는 뇌전증 환자 고용에도 불리하게 작용한다. 특히 해외에 비해 국내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뇌전증 환자의 실업률은 약 31% 수준으로, 동기간 일반인 실업률 4~6% 대비 높다.
신 교수는 "고용주와 인사 책임자, 동료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선행 연구보다 뇌전증 환자 채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개선됐다"며 "그러나 고용주의 뇌전증 인식 수준이 낮거나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뇌전증 환자 채용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강조했다.
특히 뇌전증 환자 채용 시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에 대한 우려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는 △구직자 추천 등 채용지원 연계 △고용 유지를 위한 지원 △고용 환경 및 적합한 업무에 대한 구체적 기준 마련 등이 언급됐다.
이날 행사에서는 뇌전증 환자와 가족도 참석해 자신의 경험을 함께 나눴다.
퍼플즈 이명희 활동가는 "뇌전증 대발작으로 쓰러진 후 좌절감이 심했다.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절대 쓰러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환자 입장에서는 뇌전증 증상을 잘 몰라 치료 시기를 놓치기도 하고, 삶의 안정성도 떨어진다"고 말했다.
뇌전증 환자가 겪는 어려움에 비해 실질적인 해결책이 없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뇌전증 발작이 일어났을 때 응급 대처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관련 법이 없어 법적 보호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활동가는 "뇌전증 발작 시 3S(STAY, SAFE, SIDE) 응급대처법을 활용해야 하는데, 아직은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 수준이 높지 않다"며 "TV 공익광고나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 등을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고 했다.
명지병원 이병인 교수(신경과)는 "뇌전증 관리지원법이 제정돼야 차별이나 불이익에 대한 법적 장치가 마련된다"며 "취업의 경우 보험 시스템이나 상담을 통해 지원하는 등 구체적인 제도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