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학의 이정표를 세운 사람들 39

`사지재건` 영역 문 활짝 열어

 잘린 사지(四肢), 손상 또는 손실된 피부와 근육, 그리고 뼈 등의 인체기관을 정상에 가깝게
재건, 기능을 회복시켜줌으로써 수많은 의학적 난제를 해결하게 한 미세수술(micro
surgery). 30년 전 국내 임상의학계에 `마이크로시대`가 열린 것은 순전히 한 국내 의학자의
지혜와 땀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의수(義手)를 한 법관 아버지의 고충을 덜어주겠다던 소년
시절의 꿈에 도전한 유명철 교수(경희의대 정형외과 62세).
 그로 인해 열린 의료의 마이크로 시대는 이제 국내 모든 임상분야에 골고루 보급, 보편화됨
으로써 사지재건이란 새 영역을 구축함은 물론 각종 인체 기관 및 장기이식분야를 활성화하
는 눈부신 금자탑을 세웠다.

사지 재접합술 개가
 `수술 7시간…피가 통했다.` `잘려진 다리가 이어졌다.` 28년전인 지난 76년 3월13일자 전
국 일간신문과 방송, 전문지는 이같은 제목의 기사를 일제히 대서특필했다. 유명철 교수(본지
편집자문위원)팀이 76년 2월 27일, 전기톱에 잘린 목재소 인부의 다리를 잇는 수술을 성공함
으로써 국내 의학계의 신기원을 이룩했음을 알리는 보도였다. 세계가 주목하는 사건이었다.
 잘린 손가락이나 손목을 잇는 수술은 중국이 60년, 미국이 62년 성공을 보고한 적이 있지
만 다리를 잇는 보고는 처음이었다. 유 교수는 이미 75년 자력으로 개발한 미세수술법을 이용
해 손가락 재접합술을 성공했었다.
 "모든 인체 기관은 혈관으로 영양을 공급받아야 제대로의 생명력을 갖는다는 단순한 원리
에 착안한 것입니다. 따라서 팔다리의 재접합이나 피부의 이식은 미세한 혈관을 어떻게 잘 이
어주는가가 핵심적인 성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한 거죠."
 성공여부에 관계없이 잘린 수족을 형식적으로 봉합해주기만 해야 하는 당시의 의료계 수준
이 맘에 들지 않았다.
 흔하지 않은 문헌과 관련 기구 및 장비들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그의 미세수술에 대
한 집념은 이러한 현실이 장애가 되지 않았다.
특히 1~2㎜의 미세혈관을 잇는 데 필요한 봉합사를 구하러 미국의 유일한 제조사 에치콘을
찾아가 필요성을 설명하고 원없이 실험을 할 수 있도록 많은 량의 봉합사를 제공받기도 했다.
 동물을 대상으로 수백차례의 실험을 통해 수기를 익혔다. 토끼만 하더라도 200여마리를 대
상으로 실험을 했고 쥐처럼 혈관이 가는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도 수없이 했다. 그리고 독학
으로 익힌 자신의 수기를 완성하기 위해 미국 UC샌디에고의 이선 교수를 찾아 연수를 하기도
했다. 뼈를 다루는 정형외과 의사가 수술현미경을 들여다보며 미세혈관 수술을 한다는 것이
주위에서는 걸맞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지만 그의 도전정신과 한번 정한 목표를 성취하
려는 집념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의료계 마이크로시대 활짝
 다리 접합술 성공에 자신감을 갖게 된 유 교수는 손목과 발목(77년) 등의 접합술은 물론 엄
지발가락을 손실된 엄지손가락 자리에 이식(78년), 생활기능을 회복시켜주는 등 기관이식의
새로운 영역 개척에 주력했다. 선천성 경골가관절증을 환자자신의 비골을 이식해 치료(79년)
함으로써 골이식의 신기원을 이룩하기도 했다. 80년도에는 만성골수염 환자의 손상된 피부
에 환자의 복부 대망(大網)을 이식해 정상을 회복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84년에는 골성장
이 멈춘 어린이에게 골성장판을 이식, 성공하는 등 끊임없는 그의 도전은 정형외과계의 수많
은 난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체돼 수술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공들여 수술을 해놓아도 실패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사지절단환자들로 연속해서 하는 수술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는 또
한편으로 미세수술의 보급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잇단 미세수술 워크숍에는 국내 외과계의
중진들이 많이 참여했다.
 "저의 강의를 들으려 한 외과계 원로 은사교수님이 참석하신 것을 보고 배움에는 아무런 벽
이 없음을 새삼 절감하며 무척 감동했습니다."
유 교수는 곧 미세수술학회, 수부외과, 이식외과의 학회가 창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도 했다.
수련의시절 파업 겪어
 "아버님의 영향도 있지만 X선 사진을 보며 뼈의 상태를 곧바로 파악하고 진료를 계획적으
로 할 수 있다는 점이 적성에 맞았습니다."
 `나이 들어서 사회에 봉사하고 베풀 수 있는 의사를 선택하라`는 모친의 권유에 따라 의대
(서울의대)를 지망했다.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해 정형외과를 선택했다.
 그가 서울대병원 정형외과 레지던트 4년차이던 1971년 7월 7일 의료계사상 초유의 전국
국립의대병원 전공의 48시간 시한부 파업의 회오리를 겪게 된다.
 "당시 수련의들의 처우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봉급날 한 달간 먹은 자장면 외상값 갚고
나면 없을 정도였으니 봉급이라기보다는 야식비 수준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봉급 외에도 처우
라는 것은 말이 아니었고 이런데서 오는 불만은 수련의라는 미명아래 참을 수밖에 없는 형편
이었습니다. 해마다 이런 불만이 들끓었지만 표출되지 않다가 보사부장관이 수련의들을 식모
에 빗댄 발언을 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던 거죠."
 파업에 가담한 4개 국립의대 부속병원 수련의 대표가 된 그는 `이번에는 꼭 개선이 되도록
한다`는 결심을 했다. 병원당국과의 협상이 결렬되고 당초 시한을 넘겨 파업이 장기화되자 당
시 김종필 국무총리가 중재에 나섰고 그는 당당히 처우개선의 이유를 말했다.
 "수련의들은 공장에서 기술을 배우는 사람과 다르다는 점과 국가 면허를 가진 생활인으로서
의 대우를 해달라는 주장이 골자였습니다. 김 총리도 전폭적으로 우리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건의사항을 수용함으로써 파업은 3주 만에 종료됐습니다."
 72년 수련을 마친 그는 모교병원 발령 대기 중 개원한 경희의대의 전임강사 발령(73년)을
받았다.
 병원장(95년)과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2002년)을 역임하고 이제 본연의 정형외과로 돌
아온 그는 미세수술을 이용, 혈관부착 생골이식으로 대퇴골괴사증 치료에 열중하고 있다.
또 과거에 인공고관절삽입술을 받은 1만여명의 환자 중 이 인공고관절 손상환자들의 재건술
에도 주력하고 있다. 지난99년부터 정부의 선도기술 및 의료공학 기술개발 과제로 추진한 한
국형인공고관절은 실용화 전단계에 이르고 있다.
어려운 과 기피의사
누가 존경하나
 최근 빚어지고 있는 외과계 전공의 기근사태에 대해 크게 걱정하고 있는 유 교수는 힘들고
궂은 일을 기피하는 것이 사회적 현상이긴 하지만 의사들만은 그럴 수 없다며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이 맘 놓고 그들의 일에 열중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적인 뒷받침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의사들도 병마에 신음하는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겠다고 의대 문을 들어
선 만큼 그 마음을 퇴색시키지 말고 사명감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극복하고 의사의 길을
갈 것을 당부했다.
 "의사들이 어렵고 힘든 분야를 기피한다면 세상의 존경과 대우를 받을 수 없게 될 겁니다.
또 의사자신의 부모형제나 자식들이 어렵고 힘든 그 분야의 진료를 이 땅에서 받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는 후학들에게 대의의 길을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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