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는 절망 속에서 분노를 대면할 용기에 대한 드라마

연극 ‘프로즌’
6월 9~28일까지
대학로 아르코 소극장
1980년 봄날, 할머니 집으로 심부름 가던 열 살짜리 소녀 로나가 실종된다. 세월이 흐른 후 소아성애자 랄프는 어린 소녀를 유괴하려다 체포되고, 그가 자백한 이름 중에 20년 전에 실종된 로나가 있다. 아이가 살아있다는 희망만으로 가까스로 삶을 이어오던 로나의 엄마 낸시는 20년 만에 딸의 유해를 받아들고 망연자실한다.
한편 연쇄살인범들을 연구하는 정신분석의사 아그네샤는 자신의 이론을 강의하기 위해 랄프의 케이스를 강연 주제로 삼고 그를 분석한다. 그녀가 랄프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그녀 자신의 트라우마도 모습을 드러낸다. 어느 날, 랄프를 만나 그를 용서한다고 말하겠다는 낸시. 아그네샤는 면회를 허락할 수 없다고 하지만 결국 랄프를 대면하게 된다.
 
분노를 벗어나는 첫 단계 ‘분노와의 대면’
2015년 현재의 우리 사회는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경쟁만이 가득한 시대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갈등을 보듬고 치유하는 사회적 장치는 부족하다. 결국 곪아 터진 개인의 분노와 절망은 사회 곳곳에서 적대적인 범죄나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자기 파괴 혹은 끝없는 허탈감으로 이어진다. 명상이 대세가 되고, 운동이나 종교로 스트레스를 풀고자 하는 현대인의 갈망은 뉴욕과 서울이 다르지 않다.

어떻게 하면 이 분노와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회피 혹은 용서? 설전이 필요할 수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대부분의 종교, 명상 그리고 정신과적 치료에서는 그 분노를 대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대면 중에 충분히 화내고 또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가해자나 원인제공자 혹은 사회로부터 본인의 분노를 이해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 분노와 슬픔의 강도가 극단에 가까운 경우라면? 당신의 어린 딸이 실종돼 20년을 고통과 죄책감에 살다가 그 어린 딸이 성폭행 당한 후 살해됐고 그 범인이 체포된 사실을 알았다면? 이 연극의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자신의 어린 딸을 성폭행하고 살인한 범죄자를 대면한 피해자의 엄마는 그 살인범에게 용서한다고 말한다.

토니상에 빛나는 작가 브리오니 래버리의 프로즌은 너무나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를 던진다. 시와 같은 독백으로 소녀의 엄마와 범인 그리고 정신과 의사 3인은 관객을 그 고통의 한복판으로 던진다. 엄마 낸시의 피끓는 절규와 공허한 일상은 관객을 울리고 또 비참하게 만든다. 비이성적인 살인자 랄프의 차가운 웃음과 학대받은 과거에 대한 차가운 시선은 날선 분노와 함께 연민을 만들어 낸다. 

작가는 삶의 희망을 보여주기보다는 가장 날선 고통을 여실히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각자의 고통을 대면할 기회를 안겨준다.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결국은 용서하지 못할 것인가는 관객 스스로의 결정이다. 자칫 어둡고 무겁기만 한 이 작품이 한없이 매력적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극한의 고통을 맞닥뜨리고 우리가 스스로 위안을 받을 방법을 찾게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프로즌을 통해 용서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시를 읽는 듯한 독특한 연극
한국 초연으로 첫 데뷔하는 이 작품이 개관도 전에 전 회차가 매진이다. 어둡고 차칫 어려울 수 있는 소재인 소아성애자에 관한 이야기가 왜 이토록 뜨거운 관심을 받을까? 답은 바로 가장 연극다운 연극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 연극은 고작 3명의 주인공만 등장한다. 화려한 극적 보조장치도 없다. 극도로 절제된 무대공간과 소품은 물론, 대부분의 내용이 각자의 독백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2시간 가까운 이 연극은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연극의 본질인 배우들의 연기와 호흡이 극대화 되도록 작품이 설계됐기 때문이다.

작품의 전반부는 세 등장인물의 독백으로만 이뤄져 있다. 아이를 잃어버린 날이나 범인이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에 이르는 과정조차도 너무나 시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건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서사에 대한 압박감 없이, 그들의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극 전체가 드러나는 구조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심리의 추상성을 배제하지 않은 채로 관객의 감성을 난도질하다시피 한다. 마치 서사구조의 시집을 빠져들어 읽고 듣는 느낌에 가깝다.

이런 구조에서 갈등구조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배우들의 감정을 최대한 응집할 이야기꾼이 필요할 것이다. 이 시대 최고의 미니멀리즘을 구사하는 김광보 연출이 제작에 참여한 것은 이 작품을 기대케 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분명 무대 위에서 배우가 직접 체화하는 고통을 목격하고 그 고통을 대면하는 경험은 굉장히 색다른 체험이 될 것이다.
 
김광보 연출과 극단 맨씨어터의 콜라보
이 작품은 김광보 연출과 극단 맨씨어터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더 주목받고 있다. 동시대 관객과 가장 잘 소통하는 극단이라는 평가를 받는 맨씨어터는 이번 연극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분노'를 표출하고 또 '용서'를 정의할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날것 그대로 드러나는 이 작품의 특성상,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추고 신념을 같이 하는 극단체제는 작품의 설득력을 한층 강화할 것이다. 최고의 연출인 김광보 연출과 함께 무대디자인에 정승호가, 조명에는 이동진이 그리고 분장에 백지영 등 당대 분야 최고의 제작진이 합세했다. 국내 최고의 제작팀이자 연극 프로즌과 같이 인물 간의 극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최적의 팀이라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드림팀에 의한 최고의 수작을 만날 기회는 분명 흔치 않을 것 같다.

연출 김광보는 작품에 대해 영화 ‘밀양’과 어딘가 닮아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필자도 그렇다고 느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가? 과거 어느 순간의 절망과 상처를 대면하지 못하고 있는가? 연극 프로즌을 통해 용기를 내보면 어떨지 조심스럽게 권해 본다. 연극의 작품성과 매력은 당연한 보너스다. 2015년 6월 9일부터 28일까지 대학로 아르코 소극장에서 공연된다(문의: 공연예술센터 02-3668-0007, 인터파크티켓 1544-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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