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소송 앞두고 '건보료 낭비' 여론에도 '자료확보·세미나' 등 분위기 전환 노력

담배소송에서 그간 열세에 몰렸던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내달 4차 변론기일을 앞두고 기초자료 확보, 세미나 개최 등 분위기 전환에 심혈을 기울이는 모양새다.

건보공단은 지난달 중순 폐암환자 3484명의 진료기록을 재판부에 제출한 데 이어 6일 오후 국내외 전문가 초청 세미나를 개최한다.

앞서 지난해 4월 건보공단은 개별 폐암환자가 아닌 전체 폐암환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역학조사 결과를 토대로, KT&G, 필립모리스, BAT 등 담배회사 3곳을 상대로 537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년여간 3차례의 변론에서 담배회사들은 "법률상 건보공단이 가입자를 대신해서 담배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폐암은 비특이적 질병이므로 역학연구가 아닌 개별적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부에서는 이 같은 의견을 받아들여 공단에서 소송 당사자인 흡연자 3484명의 개인 진료내역, 생활습관, 흡연 전 질병, 가족력 등 '개별적 기초자료'를 담배회사 측 변호인에 제출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이에 건보공단은 지난달 15일 개별 폐암환자들의 가족 동의를 얻은 후 환자들이 흡연으로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을 제출했다. 제출된 기록에는 폐암환자의 흡연기록과 진단 병명, 담당 진료 기관, 치료 시작 시기 등이 들어 있다.

건보공단은 그간의 담배소송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기초자료 확보 외에도 국내외 세미나를 또 다시 열었다.
 

 

이번 세미나는 '흡연과 폐암의 인과관계, 역학적 증거가 가지는 의미'를 주제로, 공단 담배소송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인과관계'에 대해 국내외 역학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공단 담배소송의 공동대리인인 법무법인 남산의 정미화 변호사가 '흡연과 폐암의 인과관계'에 대한 쟁점들을 발표한 뒤, 역학에 관한 포괄적인 철학적 논의를 최초로 제시한 요하네스버그대 알렉스 브로드벤트 교수(역학의 철학의 저자), 국제역학회지 편집위원인 서울의대 강영호 교수,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박소희 교수 등이 발제했다.

'역학'을 주제로 잡은 이유는 그간의 담배소송 변론에서 담배회사들이 "공단이 제시하는 흡연과 폐암의 인과적 관련성에 대한 근거들은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한 역학적 연구에서 나온 것이므로, 개인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면서 "장기간 흡연을 하더라도 모든 흡연자에게서 폐암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

또한 담배회사 측에서는 "흡연 이외에 대기 오염, 식이습관, 음주, 석면 등 유해물질 및 직업적 노출, 가족력 등 다른 요인으로 인해 폐암이 걸릴 수 있다"며 "역학적 증거만 제시하며 흡연이 폐암 발병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 '역학의 철학' 저자인 요하네스버그대 알렉스 브로드벤트 교수.

이에 알렉스 브로드벤트 교수는 발제문을 통해 "역학적 증거로 개별적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면서 "만일 역학적 증거들이 흡연과 폐암의 일반적인 인과관계를 나타내는데, 개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면 논리적 오류다. 역학적 증거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개별 사건에서 구체적인 확률을 제시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또한 폐암 중 선암은 흡연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던 우리나라 대법원 판결에 대해 "역학적 증거를 개별적 인과관계에 적용할 수 없다면, 이를 토대로 흡연자가 폐암에 걸리지 않기 위해 흡연을 중단하는 조치마저도 불합리하게 만드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의대 강영호 교수 역시 "담배회사들이 역학 연구결과를 통계학적 연관성으로만 치부하면서 흡연과 폐암의 인과성에 대한 역학의 역할을 폄훼한다"며 "역학은 질병 발생의 원인 또는 인과성 문제에 대한 학문적 전문성을 가진 의학 및 보건학 연구분야로, 역학적 연관성 지표 활용을 포함해 동물실험 결과, 개인의 병리학적 관찰 결과, 화학 실험결과 모두를 인과적 추론을 위한 자료로 활용하는 것"이라고 바로 잡았다.

때문에 담배회사들이 역학연구 결과를 단지 ‘통계학적 연관성'으로 한계를 지으려는 것은 "역학 연구 결과를 흡연과 폐암의 관련성에 대한 증거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을 제기했다.

또한 국제역학회의 역학 사전에도 이미 나와 있는 '인과확률(probability of causation)'의 개념을 통해 흡연과 폐암의 인과성을 개인에게 바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밝히면서, "인과확률은 특정 개인의 질병이 폭로요인에 의해 발생할 확률이므로, 개인 수준에서의 확률을 의미하기 때문에 역학 연구를 통해 관찰된 흡연과 폐암의 인과성을 개인에게 직접 적용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폐암 환자 중에서 비흡연자가 있고, 전체 흡연자 중에서 폐암에 걸리는 사람은 그 일부라는 담배회사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이는 개인간 변이에 대한 논의에 불과할 뿐이다. 위험 요인과 질병의 인과적 관련성의 크기에 대해 직접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특히 폐암에 대한 기여위험도가 90%인 흡연의 경우에는 이를 '특이적인 요인'으로 볼 수밖에 없고, 이번 담배소송에서 문제되는 폐암 중 편평상피세포암과 소세포암은 그 특이적 성격이 더욱 크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공단 성상철 이사장은 개회사를 통해 "공단의 담배소송은 흡연의 폐해로부터 국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며 "이번 세미나가 공단의 승소를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인 새정치민주연합 김춘진 의원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흡연이 화두로 자리 잡고 있다"면서 "이번 세미나를 계기로 흡연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국민들이 보다 경각심을 가지고 금연문화가 확산돼 국민건강증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를 전했다.

한편 공단과 담배회사 3곳의 4차 변론기일은 오는 5월 15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며, '역학적 증거 활용 여부'와 공단이 제출한 '기초자료'가 주요 쟁점으로 대두될 전망이다.

이와 관련한 여론은 "담배회사의 위해성을 증명하기 위한 공단의 책임적인 자세"와 "준비 없는 수백억원대 소송으로 국민 건보료 낭비" 등으로 분분하게 나뉘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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