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파리는 그야말로 세계 예술의 중심지였다. 거리에는 화랑이 속속 들어서고 대규모 전시회가 매년 수없이 열렸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운동이 벌어지곤 했다.
 그래서 전 세계의 예술가 지망생들이 파리로 속속 모여들었으며 젊고 가난한 외국인 예술가들은 몽마르트나 몽파르나스의 서민 동네에 살면서 꾸준히 예술 활동을 했는데 그 대표적인 화가로 모딜리아니, 키슬링, 파생, 샤갈, 수틴, 반통게를로, 위트리요, 로랑생 등을 들 수 있으며 그들을 `에콜 드 파리(파리 그룹)`라고 불렸다.
 그들은 포비즘과 큐비즘 같은 새로운 미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특정한 그룹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자기네의 처참한 처지와 불안한 생활을 술과 마약으로 달래가며 파리의 모습을 그렸다.
 특히 여성과 파리의 풍경을 섬세하게 표현했던 그들의 작품이 인정받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며 그래서인지 그들이 그린 인물화들은 모두 애수에 젖어있다. 그 중에서도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가 그린 `푸른 눈의 여인`(1917)의 그림 앞에 서면 왠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선 그 긴 목에서 연상되는 것은 노천명 여류 시인의 `사슴`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어다 보고 /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더욱 발길을 잡고 놓지 않은 것은 그 푸르고 깊은 눈이다. 애수에 찬 푸른 눈. 그 눈에는 무엇이 비추고 있는지 궁금해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동자의 깊고 깊은 곳 까지 밀려들어가게 된다. 그 곳엔 슬픔이 소리 없이 깔려있다.
 위의 노천명의 시 마지막 구절의 `슬픈 모가지를 하고`의 모가지를 `푸른 눈을 하고`로 바꾸면 이 시는 그림의 주인공인 잔 에뷔테른(Jeanne Hebuterne 1898~1920)을 위한 시인듯 하다.
 기다란 인물상으로 유명해진 화가 모딜리아니와 그의 아내이자 모델이었던 잔 에뷔테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 중 하나다. 3년여 세월 동안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했고 그 사랑에 힘입어 20여점의 잔의 초상화를 함께 만들어 고결하고도 순수한 미적 감각을 창출했다.
 비록 이른 죽음으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오늘날까지도 진한 여운을 남겨 그림을 보는 이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이탈리아계 유태인 화가 모딜리아니가 아리따운 미술학도 잔을 처음 만난 것은 1917년 7월이었다. 당시 잔은 그랑드 쇼미에르에 있는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모딜리아니가 살던 집 역시 그랑드 쇼미에르에 있었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란 잔은 자유분방한 학교 친구들에 이끌려 근처 카페에 출입하게 되는데, 그 곳은 가난한 보헤미안 예술가들이 출입하는 곳이기도 했다. 우연히 카페에서 눈이 맞은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됐으며 이 사랑은 완고한 그녀의 부모들도 말릴 수 없었다. 비록 보수적인 가정에서 얌전하게 자랐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탓에 모딜리아니의 탁월한 예술적 감각에 사로 잡혔던 것인지도 모른다.
 잔과 모딜리아니는 서로를 알게 된지 그리 오래지 않아 신접살림을 차렸으며 부부가 됐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이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잔의 부모가 워낙 심하게 결혼을 반대해 이들은 합법적으로 예식을 올릴 수 없었다. 열네 살 연상인 술주정뱅이, 마약 복용자, 게다가 결핵으로 몸마저 성치않은 무명 화가에게 소중하게 기른 딸을 줄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잔은 두 사람의 동거를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영원하고도 신성한 결합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잔의 투철한 종교적인 신앙심과 예술에 대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았던 곳은 몽파르나스로 당시 파리의 예술의 중심지이기는 하였지만 가난하고 퇴폐적인 분위기가 만연되었던 곳이기도 한데 이 곳에서 잔과 같이 전통적인 신앙관을 꼿꼿이 견지한 여인이 있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으로 그녀는 모딜리아니와의 사랑을 거의 숙명적인 순교자와 같은 확신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어리고 착한 잔은 그렇다고 부모와의 관계도 냉정하게 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관습적, 제도적 부부의 인정은 포기하고 단지 같이 사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모딜리아니의 건강만 허락되었다면 아마 두 사람의 세속적인 삶은 극적인 영관으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허락된 운명이 아니었다. 모딜리아니는 일찍 죽어 신화가 되어야만 했다.
 그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낀 그는 절주는 하였지만 완전히 끊을 수는 없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잔을 떠나야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두려움이 더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짧은 기간에 그는 잔의 초상화를 무려 26점이나 그렸다는 것으로도 그의 간절한 소망을 알 수 있다.
 잔은 `누아 드 코코`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그것은 야자나무 열매(코코넛)라는 뜻이다. 그녀 자신이 그린 자화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녀의 머리카락은 적갈색이었으며 머리 모양은 코코넛을 닮았으며 피부마저도 코코넛 속살처럼 하얗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그녀의 눈동자는 유난히 파란색이었다.
 잔은 화가에게 영혼을 다 쏟아 부었고 화가는 이를 고스란히 화폭에 담았다. 사랑이 영감을 낳는다는 것을 깨우친 그는 마침내 평생의 모델이 된 아내 잔을 만나서 얼굴이 긴 여자라는 불후의 캐릭터를 완성 하였던 것이다.
 결핵으로 고생하던 모딜리아니는 1920년 11월 25일 뇌막염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죽은 모딜리아니에 미친 듯이 작별의 키스를 퍼붓고는 그녀의 친정부모가 살고 있던 아파트의 5층 창문에서 뱃속에 있던 8개월 된 두 번째 아이와 함께 뛰어내려 남편을 뒤따르는 죽음을 택했다.
 영혼을 아낌없이 주고난 뒤에 남은 모델의 육신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낀 그녀는 모딜리아니가 사망한지 딱 6시간 만에 그를 뒤따랐던 것이다.
 그림 속 잔의 푸른 눈을 보고 있노라면 화가는 왜 그녀의 눈을 이렇게 파랗게 칠해 영원히 깊고 먼 곳을 보게 하여 슬픔을 영원히 남게 하였는가?
 그녀의 푸른 눈은 어떤 생각으로 화가를 보았을까?
 그녀의 푸른 눈은 사람들을 깊고 깊었던 그녀의 마음으로 끌고 들어가 애수의 극치에 달하게 함을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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