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의 슬픔 표현한 콜비츠 작품들

 독일의 여류화가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1867~1945)는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그림 공부를 하면서 색채 표현 보다는 흑백 표현이 자기 취향에 맞는 것을 알게 되어 판화가가 되었다.
 24세 때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사는 빈민가의 진료소에 근무하는 의사 칼 콜비츠와 결혼, 노동자 거주 지역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또 남편의 일을 도우며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빈민가의 실정을 사회에 호소하는 일련의 사회성 강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콜비츠 그림의 주제는 생과 사, 전쟁과 평화, 어머니와 자식 등으로 노동자를 그려도 이 세 주제가 교차되는 그림이며, 병원 문을 두드리는 임부, 소아 병동의 모자상, 죽어가는 어린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등을 그렸으며 그녀가 47세 때 차남 페타가 지원병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자 그녀는 그 아픔을 `어버이`라는 연작으로 작품화 하였는데, 등신대의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석상(石像)을 만들어 그녀의 아들이 잠들어 있는 전사자 묘지에 기념비로 세웠다.
 사실 그림이라면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인데 콜비츠 그림은 어둡고 우울하다. 즉, 그림은 그 미적 자극을 통해 감상하는 사람의 좋은 심성을 형성하여 생활에 활력소가 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인데,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에칭(동판화에서 가장 많이 쓰는 기법), 목판화, 석판화로 약자들의 아픔을 폭로하고 또 그 아픔을 실감 있게 표현해 마치 무엇인가를 사회에 고발 호소하는 느낌을 받는다.
 또 그녀는 다수의 자화상도 남겼는데 말년의 자화상은 얼굴과 표정에서 풍기는 오랜 풍상을 견뎌낸 그 강인함이 대지모신(大地母神)의 화신과 같다. 20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판화가로 인정받았다.
 콜비츠의 작품집을 보다가 `생각에 잠긴 여인`(1920)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손을 이마에 대고 흐트러진 머리에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숙여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고독과 불안이 연속되는 어떤 기다림에 지친 어머니의 모습이 강하게 연상된다.
 전쟁터에 나간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머니, 유괴 당한 자식을 생각하며 단장의 슬픔으로 가득한 가여운 어머니, 고기 잡으러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약 없이 기다리다 지친 어부의 아내 등 아무리 기다려도 기별 없는 지침의 탈진과 내적 아픔의 흐느낌으로 오장육부가 무너진 여인의 모습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뇌리를 더욱 강타하며 스친 것은 자식을 유괴당한 어머니가 TV에 출연해 자식을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다. 어린이 유괴라는 범죄는 어느 국가를 침공하는 전쟁보다도 어느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게릴라보다도 가장 악랄하고 악독한 천인공노할 범죄이다.
 순진무구한 어린이를 유괴 납치하고 값을 매겨 흥정한다는 것은 가장 비열한 비인간적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광란이며 인류 최악의 범죄이다.
 콜비츠가 그린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여인`(1898)을 보면 앞서 그림에서와 같이 기다리다 지친 여인의 생각이 분노로 변함을 표현한 것 같다. 어느 한 곳을 노려보며 눈을 사납게 부릅뜬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인내의 한계를 넘어 분노가 표출 되는 순간이다.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생활은 까마득하게 잊고 오로지 자식의 무사 귀가만을 염원하는 것에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건만 또 기다릴 대로 기다려 이제는 더 이상 인내할 수 없게 되니 분노는 발작적으로 분개로 변함을 스스로도 억제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아무리 돈이 급하고 절실해 일확천금을 얻으려 어린 생명을 담보로 돈을 요구하는 납치 유괴범이라 할지라도 콜비츠의 이 그림을 보면 마음이 동하여 아이를 돌려보낼 것 같다.
 콜비츠의 그림 가운데는 `푸른 수건을 두른 여인의 반신상`(1903)이라는 그림이 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밑으로 향한 여인 역시 무엇인가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데 표정은 몹시 괴롭고 지칠 대로 지쳐있다. 이러한 심적 타격 상태가 오래 지속되어 여인은 수척할 대로 수척해졌다.
 볼이 훌쭉하게 여위고 광대뼈가 돌출되었으며 이마 옆의 지방도 빠져 이마가 넓게 드러났다. 눈 주위 기름기는 완전히 빠져나가 함몰되었고 이마와 얼굴의 주름은 가로로만 잡힌 것이 아니고 세로로도 생겼으며 입주면의 주름은 사각으로 경사지며 잡혀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여인의 내면의 고통을 우리는 성찰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단장의 슬픔이다. 단장이란 창자가 끊기는 상태를 말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이를 `heart break`라고 표현하다. 즉, 아픔을 표현할 때 가장 으뜸가는 아픔을 심장이 멎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양 사람들은 창자가 끊기는 것으로 그리고 서양 사람들은 심장이 멎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창자가 끊기건 심장이 멎든 그것은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며 외부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콜비츠의 그림에 묘사된 얼굴의 절망의 표현으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몸의 변화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절망 상태가 계속될 때의 우리 몸에 일어나는 증상과 변화를 잘 보고한 것이 6·25 사변 때 약 7,000명의 미군이 이북에 포로가 되었는데, 이들이 그곳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에 무려 그 3분의1에 해당하는 포로가 사망하였는데 그들에 대한 보고이다.
 사망한 포로 대부분은 일상생활에 있어 매사에 의욕이 없는 상태였고, 동료들과도 말하지 않으며 넋이 빠진 것같이 멍한 상태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발적인 행위라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먼 하늘만 쳐다보고 무엇인가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죽어갔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포로생활에서 경험한 비인도적 대우에 대한 굴욕, 피로, 기아, 소모, 냉대, 그리고 절망의 나날을 보내다 죽어간 것이다. 이렇게 죽어간 포로들의 사인을 구명하기 위한 부검에서는 사인이 될만한 뚜렷한 병명을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 이들의 사인을 구명하기 위한 위원회에서는 이들의 사인을 `give up-itis` 즉, 절망염(絶望炎)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써서 판정했던 것이다.
 즉, 절망이라는 스트레스는 신체의 자율신경의 균형을 파괴해 결국은 자율 신경실조증(自律神經失調症)을 유발하게 되고, 이것이 심하거나 만성적으로 자주 반복되어 축적되는 경우 결국은 사망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절망은 즉, 단장의 기다림은 자율신경실조증을 초래하게 된다.
 또 우리나라의 전설 가운데 망부석은 어느 지방에서나 전해 내려오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다. 어부의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다 죽어 돌이 되었다는 식의 전설이다. 이러한 단장의 기다림은 쉽게 자율신경실조를 초래해 생명이 위태로워지기까지 되는데 이러한 변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가 협력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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