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8월 기쁨으로 창립에 참여, 그래도 젊음의 열정을 바쳤던 서울의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딸린 어린 자녀들이 여섯명이나 되는데다가 고등교육도 시켜야 했다. 그러나 나에게
는 월남하느라 재산이라고는 무일푼이니 국립대학교에서 주는 월급으로는 생활을 지탱하기
어려웠다.
 
의대교수를 생애의 목표로 할 계획이었지만 감당하기 어려웠다. 별수 없이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개업을 계획했던 것이다. 그리고 개업을 하더라도 특수내과를 전공한
만큼 2년간은 반드시 일반내과 수련을 받고 할 작정이었다.
 
1964년 여름.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18년간 근무하던 서울의대에 사표를 냈다.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그런데 사표를 낸지 며칠 되지 않아 가톨릭의대 윤덕선 의무
원장이 찾아왔다. 그는 나의 처지를 어느 정도 이해를 한다고 생각되는 분이었다. 그는 당시
성모병원내과 과장이던 서 모 교수가 그만두었으므로 빈자리를 2년간만 맡아달라고 했다. 또
교직자들이 주로 젊은데다가 인원도 부족해 애를 먹고 있으니 당장 와서 학기초부터 강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2년간 일반내과를 수련하기로 맘먹었던 나로서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됐다. 일단 승낙을 하
고 넓은 책장을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며칠 쉬었다. 서울의대에 있는 책들을 옮겨놓아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간 나는 책장을 채우는 것을 내나름대로 기쁨으로, 취미로 삼고 있었다. 일본의 억압 아래
서 공부를 한 만큼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우리의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갖
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 매달 또는 몇 달만에 국내에서 나오는 무
료 배포 학술지가 주류를 이루었다. 타과의 것은 기증형태로 받아서 수집, 정리해두었다.
 
외국책은 내가 책임지는 분야의 교과서 몇 권에 불과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경제적으로 여
유가 없는 나의 허영의 발동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렇게 모은 책들은 나의 자랑거리가 되었
다. 최소한 1990년도 이전에 발행된 국내잡지는 모두 갖고 있었을 정도이다. 지금은 부산에
있는 인제대학교 도서관에 자리잡고 있어서 옛 국내문헌을 찾거나 우리의 의학상의 실정을 알
려는 분들의 물음에는 부산에서 찾아보라는 것이 나의 대답이 되었다.
 
가톨릭의대에 출근했지만 교직자들의 대부분이 경성의전 후배들이어서 옛집을 찾은 것 같
아 마음이 편했다. 또 모든 창문들이 당시 처음 생산된 알루미늄 샷시로 시설돼 근사한데다가
서울의 중심지대인 명동에 위치해 환자도 의외로 많은 듯 했다.
 
출근한 다음날 아침 나는 내과 교직원과 의국원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 상견례를 했다. 그 자
리에서 비록 2년간 있을 몸이지만 그 동안이라도 주임교수에 못지않는 역할과 소임을 다할 것
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 대학병원인 만큼 가장 중요한 것이 학문탐구에 정진하면서 질서있
는 교실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우선 출근시간을 한시간 당겨 8시로 하고 이 한 시간동안 매일 학구적인 활동을
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고 아예 시간표를 짰다. 아카데미 스케줄이었다.
 
첫 시간이 고인이 되신 민병석 조교수의 4년간의 미국 의국생활 경험담이었다. 미국의대병
원에서의 수련 및 교육방법과 우리 교실이 발전하기 위해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나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기 전에는 반드시 이 시간에 참석할 것도 약속했다. 그리고 매일 진
행하기 위한 과제를 선정했다. 조교의 문헌소개, 내·외과 공통 증례토의, 방사선과와의 컨퍼런
스, 교수(또는 외부인사)의 특강, 증례토의, 임상병리토의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 우리나라
를 찾은 외국의 유명학자, 특수연구소 요원, 다른 대학의 저명교수, 특수례 경험 교수 등을 모
시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우연이랄까. 마침 병원주변의 몇몇 은행에서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교실비용으
로 쓰라고 1∼2만원의 거금을 기증했다. 이 기금은 외부교수초빙 비용 등 정말 유용하게 활용
됐다. 다른 대학병원에서 있을 수 없는 학업증진비를 얻는 특혜라고 생각했다.
 
이런 우리들의 아카데미 스케줄은 얼마되지 않아 다른 의과대학의 부러움을 받았고 1년 후
연세의대 내과가, 2년후 서울의대가 아침 학술모임을 갖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과교실의 분위기가 획기적으로 변했다며 교내 다른 과 교수들로부터 칭찬을 듣기도 했다.

가톨릭의대 성모병원에 부임한 지 한 달이 지나자 첫 달 봉급이 나왔다. 사전에 상의하지도
않았던 보수의 규모는 서울의대의 2배인 5만원이나 됐다.
 
내가 성모병원에 출근한지 얼마되지 않아 의료원장으로 김창열 신부님이 취임하셨다. 나보
다 나이는 젊었지만 퍽 겸손해 보였다. 신학교에서 윤리(신앙)를 강의한 경력을 갖고 있어서인
지 내 눈에는 그의 태도가 다른 신부님보다 더 어질게 보였다.
 
오후 진료가 끝나면 가끔 자기 방으로 불러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데 나는 의료원장실에 몇 번 다녀와서 이 명동성모병원의 직제가 이상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신부인 의료원장아래 의사인 의무원장이 있고 의과대학 학장이나 성모병원장은 의료원장이
모두 겸임하는, 3대 최고직의 장을 모두 독차지하는 형식으로 돼 있었던 것이다. 병원의 부원
장은 조교수급으로 돼 있어서 큰 일들은 혼자서 처리하지 못하고 병원장이나 의료원장신부의
지시를 받아서 처리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윤덕선 의무원장이 있을 때에는 그의 성격대
로 병원 일이나 학교사무를 잘 처리해 크게 문제되는 일은 없겠지만 그가 없으면 어려운 세상
사와 병원일은 윤리학을 전공한 신부가 처리하기 어렵지 않겠는가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보
았다.
 
한번은 한담을 하던 의료원장 신부님이 "왜 의사들은 일반직원과 동급의 대학교를 나왔음에
도 2배 이상의 봉급을 받는 등 심한 격차의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정색
을 하고 물어왔다.
 
다소 당황했지만 잠시 말미를 두고 이렇게 답변했다. "이러한 대우문제는 세계 공통이란 사
실은 아시는지요. 의사는 일반직과 달리 근무시간이 없다시피 하지 않습니까. 밤중이나 새벽
이라도 필요할 때 환자옆에 꼭 있어야 하고 정한 시간이 없이 수술은 필요할 때 하는 것이 아
닙니까. 또 응급환자에게는 급할 때 달려가 치료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 의사입니다"고 대답을
했더니 아무말씀이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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