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도 선배도 없는 의료계...의협 민주적 운영으로 개편돼야

 

국가가 집단 간의 이익이나 이념 등으로 극렬한 갈등에 빠지면 사회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리더들이 전면에 등장해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조율하는 일을 한다.

변호사 등 전문가집단에서도 서로의 의견이 첨예하게 부딪히면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 혹은 누구나 인정하는 원로들이 개입해 공동의 이익을 위해 의사소통 채널을 가동한다.

심지어 국회에서도 여야 의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소리를 지르고 서로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이다가도 문제 해결을 위해 비공식 라인을 통해서는 의견을 조율하고 더 나은 답을 찾기 위해 모임을 갖는다.

그런데 대한의사협회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통상적 기전이 작동하지 않는 독특한 집단이다. 의협 집행부와 대의원회의 대립으로 끝을 모르고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이 풍랑을 잠재우겠다고 나서는 리더도 선배도 원로도 아무도 없다.

"대학병원장 말도 안 먹히는 시대에 누구말을 들을까?"

과거 의료계에는 의사로서의 실력과 인품을 갖추고 리더로서의 역할을 하는 의사들이 몇 명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의료계의 방향추 역할을 하면서 의료계의 중심을 잡고 상황이 나빠졌을 때에도 의료계가 더 나쁜 상황으로 빠지지 않도록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리더라 할 수 있는 의사는커녕 의사들이 존경하는 의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현실은 팍팍해졌다.

서울대병원의 김 모 교수는 "과거에는 롤 모델이 될 만한 선배의사가 종종 있었다. 그 분들이 의료계의 위계와 체계 등을 잡고 또 의료계가 심각한 갈등에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을 해 왔다"며 "최근에는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의사도 없고, 의료계 내에서의 나침판 역할을 해줘야 할 원로나 중견의사들이 없다. 역할을 해야 하는 의사들이 의료계에 관심도 없고 자신들의 이익에 충실할 뿐"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 "요즘 의대에 들어오는 학생은 대부분 전국 1%안에 드는 수재들이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고 자신이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한다"며 "진료과 내에서도 후배들에게 선배의사의 말도 안 먹히는 상황이고 더 확장해 얘기하면 병원장 얘기도 병원 내에서 먹히지 않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의협의 모 이사는 "집행부와 대의원들을 중재할 인물이 있느냐 물으면 없다"며 "지금 같은 상황에 누가 개입할 수 있겠냐"라고 반문했다.

서울아산병원의 한 중견교수는 의료계 내부에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의료계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게 한심하고 좌절스럽다"며 "11만의 회원을 가진 거대조직에서 갈등이 생겼는데 어른이라 자처했던 의사들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의구심을 나타냈다.

또 "의협 내부에서 극단적인 대립이 생겼는데 중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의협 내에 존경받는 시니어그룹이 이렇게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며 "의사라는 최고의 전문가 집단에서 내부 자정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가치가 아니라 이익싸움이라 조율하기 쉽지 않다"

 
의사들이 의협의 불협화음을 걱정하면서도 쉽게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이번 싸움이 너무 감정적이고 극단적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의협의 한 이사는 "사원총회를 결정할 때 집행부 내에서도 사원총회를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다"며 "하지만 지금처럼 적과 나로 나뉘어 싸우는 상황에서 쉽게 회장의 뜻에 반대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라고 말했다.

또 "초기 의협 최재욱 부회장이 집행부와 대의원을 조율하려고 했다. 그런데 노 전 회장의 이미지가 최 부회장에게 덧씌워져 대의원들이 노 전 회장의 대리인이냐고 논의를 거부해 협상이 안 됐다"며 "지금 같은 상황에 나서면 그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그 누구도 정치적 상황에 휘말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의료계의 또 다른 인사는 의협이 가치를 두고 싸우는 게 아니라 밥그릇 싸움을 하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이 싸움에 끼어들지 못할 것이라 진단했다. 가치를 놓고 논쟁한다고 누구든지 자산의 의견을 제기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이익싸움일 때는 당사자가 아니면 나서기 어렵다는 것이다.

"끝을 봐야 결판이 난다"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져

감정싸움이 오래 되면서 이제는 의협 집행부든 대의원이든 끝을 봐야 의협이 발전할 수 있다는 괴팍한 논리까지 나오고 있다.

노 전 회장을 지지한다는 대학병원의 한 교수는 "이번 기회에 대의원들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야 한다. 몇 십년 동안 대의원을 하면서 의협을 위해 그들이 한 게 뭐가 있냐?"며 "의협 회장의 발목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하는 대의원들의 잘못된 관행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지방 의사회의 한 이사는 노 전 회장 때문에 지금의 문제가 발생했다는 의견을 보였다. 그는 노 전 회장이 불신임을 당했으면 깨끗하게 물러나야 하는데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며 그가 의협에서 물어나야 의료계가 정상적으로 운영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대의원들과의 갈등을 불러온 것은 노 회장이다. 그는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계속 하면서 거짓말을 해 오고 있다"며 "여의도에 모이기도 하고 휴진도 했지만 결국 원격진료는 국회에 가 있다. 그동안 우리가 뭘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왔다. 노 회장이 의협에서 떠나야 의료계가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잘라 말했다.

의협 집행부와 대의원들의 파열음을 내부갈등으로 몰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도 나왔다. 의료계의 한 인사는 의협의 성장통이라고 보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그는 "넘어지면 피가 나듯 정관에 따라 불신임 된 노 회장이 가처분신청을 내고 또 대의원들이 행동을 취하는 등 이런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며 "의협이 발전하기 위한 성장통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집행부와 대의원들의 대립을 신구갈등으로 몰고 간 것은 노 회장이 만든 프로파간다라고 지적했다. 노 회장이 불신임시키려는 것에 맞서기 위한 방법으로 대의원들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신구갈등으로 몰고 간 것이란 얘기다.

그는 "만일 대의원회에 문제가 있다고 인지했다면 왜 취임 초기에 얘기를 하지 않고 지금 시기에 대의원 개혁과 내부 개혁을 얘기하고 있겠냐"라며 "대의원들도 처음에는 노 회장을 반대한 게 아니었다. 일에 성과가 나지 않고 분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정관에 의해 불신임 된 것이다. 대의원들이 그들이 가진 권리와 의무를 행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의 중재는 서로의 입장이 비슷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고 중재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의료계의 한 인사는 무턱대고 집행부와 대의원들이 논란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 의협 정관에 따라 논리 싸움을 해야 한다며 의협도 이제 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개편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집행부나 대의원의 이익이 아니라 회원들의 이익을 우선에 두고 더 나아가 국민의 이익까지 고려하는 의협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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