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와 오랜시간 상담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한후 봉직의·개원의로 진료활동을 하다가 10년전 귀국, 우리나라 면허를 취득한 후 부친의 고향 인근인 경상북도 의성 안계면에 '권의원'을 개원한 권영만 원장. 시골 동네의원 원장으로 새 삶을 시작한 그는 미국서 진료하던 습관이 지워지지 않는 듯 오늘도 환자와 긴 시간을 얘기하면서 대기환자들의 눈총을 받고 있다.

"환자와는 가능하면 오랜 시간 이야기하려 합니다. 일상적인 소소한 것에서부터 가족사나 마음 깊은 곳의 아픔, 질병에 대한 얘기까지 깊이있게 나눕니다. 그래야 어떤 부분을 불편해하며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신뢰도 형성됩니다."

문제는 시간이다. 길게는 1시간 동안 이어지는 상담 때문에 불평하고 기다리다 일부는 돌아가는 환자가 생기곤 한다. 심지어는 죄없는 간호사가 욕을 대신 먹으면서 난처해 하기 일쑤다. 그렇지만 환자들 대부분은 자신이 진료 받을 때 충분한 설명과 함께 의사와 깊이있는 소통을 할 수 있어 매우 흡족해 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 세세하게 상담하는 것은 환자에겐 이득일 지 몰라도 의료기관 경영 측면에서는 큰 손실이다. 이른바 환자가 줄 서 있는 대학병원과 같지는 않다하더라도 '빨리빨리' 진료와 검사를 하고 다음 환자를 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 환자를 보는 시간에 관계없이 똑같은 비용을 적용하는 현재의 낮은 건보수가로는 직원 월급주기에도 빠듯한 상황이 된다.

"간단한 질환을 보는 개원가에서는 현재의 건강보험 수가를 적용하면서 의료기관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시골동네여서 여러 환자들을 두루 진료할 수밖에 없는데 탈모분야를 특화해 집중적으로 진료하기 때문에 버티고 있어요. 미국이 옳다고 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 수가가 너무 낮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요즘은 간호사의 재촉으로 진료시간을 30분 이내로 줄였으나 세살 버릇 어디가랴. 진료실에서 환자와 눈을 마주치면 살짝 웃으며 여전히 가족사부터 챙기며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운다. 환자 가슴속에 담고 있었던 것, 개인 사정, 심지어 기르던 애완견 새끼를 낳은 이야기에도 즐겁게 맞장구친다.

권 원장은 "질병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마음이 다치면 외적으로 표가 날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며, "오래 얘기하다보면 질병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좋은 약, 좋은 치료법 등 의학발전의 속도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지만 '긍정적인 마음'만큼 좋은 치료법은 없다고 믿고 있다. 이런 확신 때문일까. "남들보다 많이 듣고 그리고 조금 더 긍정적인 마음을 만들어 주는 것"이 자신의 특별한 치료법이라고 웃었다.

국내외 탈모환자 몰려

경북 의성군 안계면은 '시골동네'다.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이 모두 도로가 뚫려 교통이 좋아졌지만 외진 동네임에는 분명하다. 이곳에서는 결혼 이주민은 흔히 볼 수 있지만 관광이나 진료를 위해 찾는 외국인은 흔치 않다.

그러나 최근들어 외국인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고 있다. 영국·호주·필리핀·미국 등 동서양 여러 국가에서 이곳을 찾는 이가 많아진 것이다. 게다가 제주도나 경기도 일산 같은 경북 의성군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부쩍 발길이 많아졌다.

이유는 단 하나. 탈모 치료를 잘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는 권 의원 권영만 원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의원이라서 이 환자 저 환자 두루 보지만 탈모환자가 오면 더 집중하게 되고 관심도 배가 된다. 그의 노하우를 제대로 살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생활하던 학생 시절 한참 외모에 관심이 있을 때 탈모가 있거나 대머리 스타일 학생들이 꽤 많은 걸 봤어요. 그때 저 사람들은 얼마나 스트레스와 고민이 있을까 생각했었죠. 그런데 저도 머리카락이 빠지고 있는 거에요."

탈모 관련 공부는 이렇게 시작됐다. 게다가 탈모 시장이 넓고 크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연구에 더 매진할 수 있었다. 수련도 받았다. 그리고 여러 연구에도 두루 참여했다.

이런 풍부한 경험은 우리나라에서 개원하면서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탈모 치료의 본능을 자극한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평범한 시골 의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질환들을 진료하고 있을 때였어요. 아는 교회 장로께서 심한 탈모로 인해 한번 도와 달라고 하더군요. 미국에서의 많은 경험이 성공적인 치료로 이어졌어요. 장로께서 주변에 지인분들에게 알리기 시작하면서 환자가 많아졌어요. 소문의 힘이 무섭던데요."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

조금씩 환자가 많아지면서 권 원장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지만 그렇다고 환자 상담시간을 단축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환자와의 신뢰가 더 쌓여졌다. 마음의 여유가 찾아들 즈음, 그는 평소 마음먹고 있었던 것을 행동에 옮겼다.

바로 지난 11월 경북지역 사회복지공동 모금회 고액 기부자클럽인 아너소사이어티에 15번째 기부를 한 것이다.

"제가 사는 지역에는 소외받고 힘들게 사시는 분이 많다. 무엇인가 돕고 싶은데… 생각하다가 기부를 결정하게 됐다. 지역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당연히 지역사회에 다시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누군가는 정치적 색깔이 있지 않을까 의심도 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없기에 기부라는 것을 선택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기부라는 것 때문에 자신이나 가족들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계기가 됐기에 앞으로도 힘 닿는데 까지 기부한다는 계획이다.

"의사라는 직업은 환자에게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치료 과정에서 희망을 갖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환자들을 보면 그분들의 에너지를 받아 제가 도움을 받고 있지않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럴 때 정말 보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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