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H1N1 조류독감이 전세계를 휩쓸었을 때 중국에서는 기면증이 급증했다. 얼마 뒤 유럽에서는 H1N1 백신인 팬덤릭스를 접종받은 소아에서 1만5000명 중 1명 꼴로 기면증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나오면서 의료계를 발칵 뒤집었다.

생각지 못한 두 연관성은 의료계에 커다란 의문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유가 밝혀지지 않아 자가면역 이상일 가능성이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로 떠올랐을 뿐 누구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 18일 Science Translational Medicine에 발표된 논문에서 스탠포드의대 연구진이 기면증은 자가면역질환이라는 직접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기면증 연구에 전환점을 가져올지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기면증은 사람이 깨어있도록 유지시키는 호르몬인 히포크레틴을 생상하는 뉴런이 점차 감소되면서 발생하는 질환이다. 면역학자인 Elizabeth Mellins, 기면증 연구자인 Emmanuel Mignot 교수팀은 히포크레틴을 타깃으로 하는 특정 면역세포(CD4+ T세포)군을 찾았다. 특히 이 세포가 기면증 환자에서만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연구팀은 자가면역질환이라는 가설을 입증할 '결정적 단서(smoking gun)'로 기대했다.

신경과 전문의인 미국하버드의대 Thomas Scammell 교수는 "지금까지 많은 과학자가 히포크레틴에 대항하는 자가 항체를 찾아내는데 실패했다"면서 "이번 연구 결과는 머지않아 기면증 분야에서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연구에서 왜 어떤 사람에서는 히포크레틴에 대항하는 T세포가 생성되고 어떤 사람에서는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히지 못했지만 연구팀은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각각 부분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추측했다.

유전적 요인으로는 HLA 유전자 변이가 유력한 후보군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 Mignot 교수팀이 Genetics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기면증 환자의 98%가 HLA 유전자 변이를 가지고 있는 반면 일반 인구집단에서는 25%에 불과했다. 감염과 같은 환경적 요인도 기면증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에 연구팀은 기면증 관련 유전자 변이를 포함해 유전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히포크레틴을 모방, 면역시스템 반응을 일으키는 환경적 요인에 맞딱뜨리면 기면증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예를 들어 2009년 발생한 H1N1 판데믹도 방아쇠를 당기는 환경적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이다. 실제로 연구팀은 판데믹 당시 채취한 바이러스에서 이번 연구에서 발견한 것과 동일한 CD4+ T세포를 찾아냈다.

또 2009년 판데믹 전 기면증 신규 환자 발생률은 겨울이 지난 직후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기타 균주 또는 바이러스도 기면증 발생에 관여할 가능성도 제기했다.

하지만 팬덤릭스 투여와 기면증 발생 간의 연관성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같은 단백질을 포함하고 있는 다른 인플루엔자 백신은 기면증 발생을 증가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Mellins 교수는 "어째됐든 향후 히포크레틴을 닮은 화합물을 플루 백신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팬텀릭스 사건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Scammell 교수는 "이번 연구에서 해당 T세포가 실제로 히포크레틴 뉴런을 사멸시키는지는 보여주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어쩌면 T세포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T세포는 중개인 역할을 하고 있을뿐이거나 기면증이 다른 질환의 중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럽기면증네트워크 회장을 맡고 있는 네덜란드 레이덴대 Gert Lammers 교수는 그래도 이번 연구의 의의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향후 대규모 연구를 통해 이번 결과를 재현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추후 연구에서도 이 가설이 확인되면 새로운 진단 검사법 개발을 위한 중요한 첫걸음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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