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과학 독립시킨 박충서 박사

1982년 2월. 열사의 땅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돌아온 그는 곧 쾌보를 접했다.

20년간 외롭게 홀로 벌여온 "신경과(科) 독립투쟁"이 종지부를 찍게 되는 순간이었다.

전문의 전문과목에 관한 조항을 "전문의수련및자격인정등에관한규정"(대통령령)으로 이관하는 의료법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이다. 이 법개정은 곧 신경정신과가 신경과와 정신과로, 방사선과가 진단 및 치료방사선과로 각각 분리되고, 재활의학과가 신설됨을 의미하는 것이다.(대통령령 제10874호)

험난한 투쟁의길

"신경과 독립투쟁을 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치고 병을 얻었습니다. 요양차 선택한 것이 사우디아라비아 아부하에 있는 현대건설의 발전소 공사현장 의무실장 행이었습니다. 수도승과 같은 생활이었지만 건강회복에도 도움이 되었고 시간적인 여유도 있어서 그동안 신경학교본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박충서 박사(77세)가 사우디에 가 있는 동안 신경과 독립에 적극 참여했던 연세의대 김기환 교수와 순천향의대를 설립한 서석조 박사가 정신과와 타협, 81년말 의협에 준회원으로 등록했던 대한신경내과학회를 취소하고 정신과에서 새롭게 분리하는 식으로 신경과학회를 창립, 의협 정회원학회로 등록을 했다.

이에 따라 83년 제1회 신경과전문의시험이 시행, 본격적인 전문의배출이 시작되고 전공의들도 마음놓고 지원을 하게됐다.

그러나 신경과의 가는 길은 험했다.

환자들이 신경과로 몰리는 현상이 빚어지자 물의가 일었다.

그가 83년 자리를 잡은 영남의대 병원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1년후 계명대학에 신경과가 신설됨에 따라 이같은 현상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신경과학과의 만남

박충서 박사의 신경과 독립투쟁은 1964년 그가 몸담고 있던 국립의료원 시절부터이다.

약사의 길을 걸으려 서울대약대 전문부를 48년에 졸업한 그는 50년에 경북의대 본과에편입학, 54년에 졸업을 하게 된다. 미국유학을 마치고 58년 1월 귀국한 그는 그해 9월에 개원한 국립의료원에 공채로 몸을 담게 됐다.

"당시 병원장이던 고 이종진 박사께서 신경과에 소속되기를 요청해왔습니다. 신경과과장 덴마크인 의사 라우슨 박사의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학문을 시작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보람이 있겠다는 생각에 원장님의 요청을 받아들였죠."

이렇게 신경과와 인연이 시작된다.

신경과 2인자가 된 그는 62년 9월 라우슨 과장의 소개로 코펜하겐대학 신경생리학연구소로 유학을 갔다.

근전도의 창시자인 북탈교수의 지도로 1년간 근전도와 뇌파를 공부한 후 그의 추천으로 예정에도 없던 영국 런던의 왕립 신경학연구소에서 7개월 간의 연구생활을 더 했다.

64년 귀국하자 마자 라우슨 과장이 "박 선생이 왔으니 나는 귀국하겠다"며 과장자리를 넘겨주고 덴마크로 돌아갔다.

당시 모든 임상과가 부과장까지 스칸디나비아 출신들이었으나 유일하게 신경과만 한국인 과장으로 바뀐 것이다.


전공의 배정마저…

신경과 진료를 의욕적으로 시작한 그는 많은 새로운 질병의 환자들을 맞았다.

국내에서 처음 발견, 학계에 보고한 신경질환만 30여종이나 된다고 손꼽는다.

그중 다발성경화증 44례에 대한 보고는 66년 미국신경과학회지에, 68년에는 세계신경학회지에 각각 게재됐다.

"다발성경화증 16례를 61년 처음 국내학회에 보고했을 때 모두 거짓말이라고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계학회에 보고, 인정을 받자 조용해지더군요." 67년의 아태신경학학술대회, 68년 일본신경학회등에서 한국의 다발성경화증을 특별강연하자 대한내과학회(69년) 등 국내학회와 수도, 서울, 연세, 이화, 가톨릭, 중앙, 충남 등 의과대학에서 강의를 의뢰해오기 시작했다.

신경과학의 메신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전문의자격제도의 변화로 전공의 모집을 할 수 없는 서러움을 겪게 된 것이다.

또 기본적으로 학회가 구성, 대한의학협회에 정회원학회로 등록이 돼야만 전문의자격증제를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이은 좌절

71년 2월 25일. 그간 나름대로 신경과 수련을 받았거나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온 인사들이 모여 대한신경내과학회를 창립했다.

그러나 4년후 회원들의 업적을 모아 의협에 정회원 등록을 신청했으나 관련과의 반대로 거절됐다.

그나마 자긍심을 갖고 진료에 임하던 소수의 회원들이 이민이나 개원 등으로 흩어지고 전공의들도 외면했다.

신경과 간판을 걸수도 없는 처지가 됐다.

73년말 한양대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내과에 소속된 그는 신경내과 독립과 간판을 달아달라는 요구가 병원측으로부터 거절당하자 75년 개원을 했다.

그러나 신경과나 신경내과 간판은 역시 내걸지 못했다.

81년 9월 일본에서 개최된 세계신경학회에 참석, 동남아는 물론 아프리카에까지 신경과 의학자들이 독자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것을 보고 격분, 귀국하자마자 의원문을 닫고 외로운 신경과 독립운동에 돌입했다.


대통령에 진정서

"국회와 관계부처 공무원, 의료계단체 주요인사, 전국의과대학, 병원 등에게 신경학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알리는 홍보물을 뿌렸습니다. 덕분에 관계부처 고급공무원들과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시간이 흘러 이들이 경질되자 새로된 공무원들은 면회조차 해주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대통령에게 직접 호소문을 보냈습니다."

공무원들이 이 사실을 힐난하는 한편 곧 열릴 국회에 상정하겠다며 신경과의 독립안을상정하라고 했다.

한달의 시간이 있기에 세계 각국의 신경학회의 창립연도, 전문의수, 독립된 클리닉 수, 연구기관 수 등의 자료를 요청했다. 뜨거운 격려와 함께 회신이 속속 답지했다.

24개국의 자료를 간추려 국회에 제출했다.

그리고는 대한신경과학회를 재창립했다.

일단 내과학회의 인준을 받아 의협 준회원학회로 등록에 성공했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귀착

"이제 제가 할 일이 끝났습니다. 신경과학회가 발전하도록 뒤에서 지켜보며 응원을 하는 것이 저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는 지난 84년에 창립한 대한초능력학회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어렵게 의학자의 길을 걸어온 그는 항상 사랑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그리고 목사나 스님, 신부만이 성직자가 아니라며 의사도 성직자임을 명심할 것을 후학들에게 부탁한다.

따라서 재화에 대한 관심이나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만사에 사랑으로 대하라고 강조한다.

"인생의 근본도,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도 사랑이며 세상 모든 것이 사랑이란 한 점으로 귀착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일산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의 주름진 얼굴을 뒤덮은 흰 수염이 인자함을 더해주었다.

▲사진·김형석 기자 hskim@kimsonl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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