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 임원진 “과학적 근거 갖춘 최선의 임상적 매뉴얼" 주장 대립

1. DSM-5, 최고의 진단 안내서 인가
2. 성인 ADHD 진단 기준도 제공
3. '자살행동장애' 질환으로 구분 권고
4. 일부에선 보이콧…“진단 인플레이션 유발 가능성 높아”


1970년대 초 정신건강의학계는 진단의 한계를 지적한 두 건의 폭로로 큰 위기를 맞았다. 똑같은 환자를 두고 미국 의사와 영국 의사가 전혀 다른 진단 결과를 내리는 과정을 담은 비디오테입과 미국의 심리학자 David Rosenhan 박사가 가짜 환자 행세를 하며 정신병원에 입원한 체험기가 그것이다. 학계는 가짜 환자를 가려내보겠다며 Rosenhan 박사에게 자신있게 재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참패했고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다.

이에 자극받은 미국정신의학회(APA)가 쇄신의 의미로 만든 것이 1980년 발표된 정신질환 진단과 통계 편람(DSM) 3판이다. 이전까지는 환자의 경험과 환경에 대한 신경증적인 반응에 의존해 진단을 내렸다면 3편부터는 특별한 관찰 증상을 기준으로 삼았고, 이는 4판에서도 수용됐다.

그런데 최근 5판 출간을 둘러싸고 정신건강의학 진단이 새로운 위기를 맞았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끈다. 주장자는 4판 개정의 주역인 미국 듀크대 Allen Frances 교수다.

그는 5판 발표 전날인 지난달 17일 Annals of Internal Medicine에 기고한 글에서 "모든 진단 시스템 변화는 예상치 못한 과잉진단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면서 "그러나 DSM-5는 이러한 위험을 무시하고 오히려 정상과의 경계를 흐리게 해 유병률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객관적인 진단 기준 제시 못해

Frances 교수는 이전부터 "5판에서의 변화는 분명히 안전하지 않고 과학적으로도 맞지 않다"며 적극적으로 비판해왔다. 5판이 미국정신과학회 이사회 승인을 받은 뒤 작성한 글에서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45년 경력 중 가장 슬픈 순간이다. DSM-5는 성경이 아닌 안내서"라면서 무시해야 할 최악의 변화 10가지를 소개하기도 했다.

핵심은 진단 인플레이션 유발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Frances 교수는 "새로운 진단기준에 미뤄보면 평범한 슬픔은 주요우울장애로, 노화로 인한 깜빡거림은 경도신경인지장애로, 짜증은 분열적 기분조절장애로 과식은 폭식증으로 오인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게다가 이미 과잉진단율이 높은 주의력결핍장애는 대상 범위가 확대되면서 성인에게도 쉽게 적용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진단 기준은 3판에서 경도 우울이나 일반적인 불안, 사회적 불안, 가벼운 공포증, 성기능장애, 수면장애 등 일상속에서 겪을 수 있는 문제에 대한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서 한차례 대폭 완화됐다. 이에 1994년 발표된 4판에서는 진단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좀 더 과학적 근거를 보강하고 보수적인 입장에서 접근해, 새롭게 제안된 진단 기준 94개 중 2개만 채택하고 반영했다.

Frances 교수는 "그럼에도 지난 20년간 주의력결핍장애 발생률은 3배, 양극성장애는 2배, 자폐증은 20배나 증가했다"면서 "5판의 진단 기준을 적용하면 위양성률과 불필요한 치료율은 더욱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그 이득이 고스란히 제약사의 마케팅 혜택으로 돌아간다는데 있다. Frances 교수는 "실제로는 정신질환으로 진단되지 않을 일상 생활에서의 문제를 두고 제약사에서는 새로운 DSM 정의에 따라 마치 화학적 불균형에 의해 발생해 약물 치료가 필요한 것으로 프로모션할 수 있다"면서 "이는 과잉 진단 및 치료로 건강한 사람을 대하느라 정작 치료가 꼭 필요한 환자를 놓치는 등 자원의 잘못된 배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Frances 교수는 "새로운 진단 기준으로 인해 더 비싸고 부작용이 심한 불필요한 약물 소비를 드라마틱하게 증가시킬 것이다. 왜 정부는 신약의 안전성과 효과성은 조심스럽게 모니터링하면서 진단 기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며, 다른 메커니즘을 통한 진단 시스템 개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의사들에게는 "DSM은 공식적인 매뉴얼이 아니며, 누구도 사용을 강요할 수 없다"면서 만약 사용한다해도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할 것을 당부했다.


구태의연한 DSM 체계 비판

5판에 반기를 든 것은 Frances 교수뿐 아니다. 영국심리학회 임상심리학분과(DCP)는 비슷한 시기 DSM의 분류체계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원(NIMH) Thomas Insel 원장은 공식 블로그를 통해 5판의 타당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Insel 원장은 "증상 기반 진단은 다른 의학 분야에서 한때 사용되다 이미 지난 50년 사이에 모두 사라진 방법"이라면서 DSM이 여전히 구태의연한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객관적 과학에 기반을 두는 방향으로 진단 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수십년간 DSM 카테고리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바이오마커에 대한 내용을 거부해왔다"면서 "앞으로 증상뿐 아니라 유전학, 영상의학, 인지과학, 그리고 기타 관련있는 모든 자료를 한데 모은다면 새롭고 더 나은 치료 타깃을 창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DCP는 DSM이 정신질환을 바라보는 시각이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문제를 지적했다. 지금 기준만 놓고 봤을 때 대표적인 정신질환인 조현병과 조울증 마저도 그 진단이 유효하거나 유효하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성명서 초안 작성에 참여했던 Lucy Johnstone 박사는 "사별과 상실, 가난, 차별, 트라우마, 남용 등 여러 사회 심리적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사람들이 정신적 문제를 겪는다는 근거가 최근 압도적"이라면서 현재 DSM처럼 "생물학적 원인만 놓고 따지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APA, 과잉치료 우려 근거 없다

이러한 반대 입장이 쏟아지자 APA 주요 임원진들은 학술대회장에서 5판 발표와 더불어 적극적인 방어논리를 펼쳤다.

APA Dilip Jeste 회장(캘리포니아대 교수)은 "개정안은 환자가 보다 정확한 진단을 받고 그에 따른 적절한 치료를 받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면서 "DSM-5는 최고의 과학적 사실에 입각한, 환자를 위한 최선의 임상적 매뉴얼"이라고 소개했다.

DSM-5 태스크포스 David Kupfer 위원장(피츠버그대 교수)은 "태스크포스에서는 이미 연구를 통해 진단 시스템 변화가 유병률이나 서비스 적격성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현재 제기되는 우려는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다.

오인 진단 가능성에 대해서도 문제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예를 들어 주요우울장애에서 사별배제 항목이 삭제된 것과 관련해 Kupfer 위원장은 "사별배제 항목을 삭제한 이유는 일부 개인에서 주요 우울장애가 간과될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라며 "오진을 막기 위해 병적인 우울과 정상적인 슬픔을 구별할 수 있는 자료표도 첨부했다"고 말했다.

또 분열적 기분조절장애는 일반적인 소아기 짜증이 아니라 과잉된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6세 이하는 진단 대상에서 제외시켰으며, 경도인지장애도 일반적인 깜빡거림이 아닌 명확하게 병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APA Jeffrey Lieberman 차기 회장(컬럼비아대 교수)도 개정안이 과잉치료를 불러일으킨다는 의견에 대해 "부적절하고 부정확하다"며 "DSM 진단 가이드는 현재 알고 있는 질환을 어떻게 가장 정확하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반박했다.

Kupfer 위원장은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환자의 치료 방법으로는 약물뿐 아니라 효과적인 비약물적 방법도 존재한다"면서 약물 과잉 사용을 불러올 가능성은 이번 개정과 무관함을 재차 강조했다.

APA 연구이사이자 DSM-5 태스크포스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Darrel Regier 박사는 "DSM은 임상진료지침이 아니다"면서 "APA에서 진료지침을 만들고 있지만 DSM과는 완전히 분리된 체계"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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