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근대 최초 일본·미국 유학생 유길준


유길준이 다녔던 덤머아카데미
현 미국 동부 명문 사립 고등학교
거버너스아카데미로

학생 6명 당 교사 1명 비율

유길준이 당시 덤머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는 모스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교수님을 즐겁게 해드릴 일이 있습니다. 어제 오후 시험을 치러 87점을 받았습니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 16점이나 더 받은 점수입니다. 물론 100점보다 13점이 낮은 점수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신입생인데다 외국인으로 시험을 면제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시험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 열심히 공부를 해서 다른 학생들과 같이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유길준은 1884년 11월3일 모스 박사에게 편지를 보내 성적이 더욱 향상되었노라고 자랑을 하고 있다.

"화산과 지진 그리고 대륙의 생성과정 등에 대한 시험을 치러 94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문항에 달하는 수학시험에서 100점을 받았습니다. 교수님, 저는 교수님의 충직한 제자가 될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

비록 27세의 늦깍이 유학생이었지만 이 편지들을 통해 유길준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 확인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유길준이 다녔던 '덤머 아카데미(Dummer Academy)에 대해 잠깐 더 살펴보자. 덤머 아카데미는 여러번 교명이 바뀌었으나 항상 덤머라는 이름은 들어갔다. 그러나 현재는 덤머라는 이름이 빠지고 그냥 ‘거버너스 아카데미’라고 부른다.

남녀공학으로 학교부지는 55만평에 이른다. 한국 학교들에 비해 대단히 넓다. 현재 학생수는 유길준이 다닐 때보다 대폭 늘어 9학년부터 12학년까지 총 372명이 재학중이다. 한 학급당 학생수는 12명이며 교사대 학생비율은 1:6명으로 매우 좋은 사립학교다. 이 학교의 졸업생 가운데 상당수의 학생들이 미국 명문대학에 진학을 하고 있다. 이 학교는 유길준이 다닐 때만큼 명성은 유지하지 못하나 여전히 동부의 명문 고등학교로 남아 있다.

덤머 아카데미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던 유길준은 1885년 6월 드디어 귀국을 결심한다. 보빙사 일원으로 임무를 마치고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 시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지 1년 8개월만의 일이다. 이 기간은 사실 영어를 제대로 익히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20대 후반이던 유학생 유길준이 2년도 안되는 기간에 영어를 능숙하게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일본 최초 유학생인 니지마 조가 미국 명문 앰허스트대를 졸업하고 중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 룽훙이 예일대를 졸업한 것에 비하면 한국 최초 미국 유학생 유길준의 중도 학업 포기는 개인의 좌절일 뿐 아니라 한국 유학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유길준이 왜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조선으로 돌아갔을까? 이에 대해서는 명확히 설명하는 자료가 없다. 단지 조정의 소환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의 귀국이 갑신정변 때문이었다면 1884년 12월 정변 발발 직후 돌아갔어야 했으나 그는 6개월을 더 공부하다가 귀국했다.

유길준 자신도 왜 중도 귀국을 하는가에 대한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일부 사학자들은 유길준의 일본 및 미국 유학을 지원했던 민영익이 갑신정변에서 개화파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어 더 이상의 경제적 지원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학자는 갑신정변 후 총리대신 김홍집이 궁중 내 통역관 등의 요직을 제의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한다. 이와달리 유길준이 어지러운 조선의 상황으로 인해 의욕을 잃고 자진해 귀국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진실을 알 수 없지만 유길준이 품었던 조선 개화의 꿈과 열정은 식지 않았다. 유길준은 귀국하는 배에서 모스 교수에게 긴 편지 한통을 보냈다. 그 편지에서 자신이 조선에 돌아가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에 대해 썼다.

"교수님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제가 똑똑한 지식을 얻지도 못하고 미국을 떠나게 된 것을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에 정변이 일어났고 그래서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날을 기억합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어떻게 하면 활동력을 되찾고 악이 아닌 정의를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활동이외에 어떤 종교도 도움이 안 되며 그 활동력이란 장래를 위한 준비를 하면서 성실한 생각을 갖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조선으로 돌아가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 근자에 결론을 내린 것을 우리 국민들에게 제의하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조국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보면 그의 귀국이유를 알듯 하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유길준은 귀로에 태평양을 건너지 않고 유럽을 경유하는 우회로를 택했다. 서구문명을 더 많이 보려는 열망 때문이었다.

그는 이 과정을 서유견문을 집필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유길준은 뉴욕에서 영국행 기선에 올라 런던에 들른 다음 이집트 세이드 항을 거쳐 홍해를 통과했다. 이어 싱가포르와 홍콩 일본을 경유해 1885년 12월 중순 인천에 도착을 했다.

인천부두에 내린 유길준은 2년반전 상투에 갓쓰고 도포를 입었던 선비 유길준이 아니라 양복을 차려입은 서양 신사의 모습이었다.

유길준은 갑신정변의 주모자였던 김옥균, 박영효 등과 친했다는 이유로 곧바로 인천에서 체포돼 우포청에 수감됐다. 두달만에 풀려난 그는 우포장 한규설의 집에 7년간이나 연금됐다.

유길준의 유학과정을 추적하면서 알게 된 하나의 사실은 그의 일가가 모두 유학을 했다는 것이다.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은 도쿄 메이지 법률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1905년 법학통론을 저술한 법학자이다. 유길준의 큰 아들 유만겸도 일본유학파다.

그는 도쿄제국대학 경제학과에서 공부한 다음 총독부 관료를 지냈다. 또다른 아들 유억겸도 1922년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유학생이다. 그는 그 뒤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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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렬 미래교육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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