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가치에 대한 공론의 장 필요"<br>현대사회 의료 욕구는 다양…가치재뿐 아니라 사적재 영역도 자리잡아

의료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치인가?
의료윤리연구회(회장 홍성수)는 지난 4일 저녁 대한의사협회 동아홀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제26회 연구모임을 개최했다. 강의를 한 목광수 경상대학교 철학과 교수는 "의료는 사적재나 공공재보다 가치재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현대사회에서 의료의 가치는 재정의가 필요한 시점이며 이를 위한 공론의 장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진행된 강의와 이어진 토론의 주요 내용을 문·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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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료에 대한 가치 규명이 왜 필요한가?

최근 의료를 둘러싼 대부분의 논쟁은 결국 '의료가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치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정의론은 무엇을 분배할 것인가와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모두 포함해야하지만 최근 이뤄지고 있는 정의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에 치우쳐있다. 그러나 선행돼야 할 중요한 것은 무엇을 분배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이다. 분배의 대상이 정해지면 분배 방식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료윤리적 측면에서 정의를 이야기하려면 의료에 대한 가치 규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의료에는 의료행위, 의료기술 개발, 의료 자원(장기·조직 등), 의료 약물, 의료기기 등 많은 것 이 포함되지만 가장 관심이 많은 영역은 의료를 보건(Health Care)이나 '의료보호(Medical Care)와 같은 ‘의료행위’로 간주하는 영역이다.

- ‘정의’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불을 붙였던 마이클 샌델은 지난해 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의료행위를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것으로 평가했는데?

샌델은 ‘의료의 목적은 국민의 기본 필요인 건강’이라는 것을 전제로 ‘의료는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가치’라고 했다. 이는 의료라는 가치에 대해 특정 형이상학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입장이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수용되기 어렵다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그 전제가 개인의 생각이 아닌 사회 구성원간의 합의에 따른 것이라면 그의 주장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의료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의료의 가치’ 문제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마이클 왈쩌(Michael Walzer)에 의하면 가치는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구성원들의 사회적 이해와 공감대에 의해 창출되고 공유되는 것이다. 특정 영역에 대해 사회구성원들의 합의로 규정된 가치는 그 자체로 관습주의적인 힘이 있다.

- 우리 사회에서 합의된 의료의 가치는 무엇인가?

경제적 관점으로 보자. 여기서는 가치를 사적재, 공공재, 가치재로 구분한다. 의료를 사적재로 구분하면, 시장원리가 적용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의료를 사적재로 보지 않기 때문에 공급에 대해 규제하고 있다. 최근 서남의대 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 의대의 무분별한 설립과 의학교육에 대한 관리 부실로 실력 낮은 의료인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올 경우 국민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우려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의료를 사적재로 보지 않는 관습 때문이다. 또 의료에 완전경쟁이 적용될 경우 거대자본 진출로 의사 고유의 권한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고, 돈 있는 사람만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수요자도 부정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 더욱이 의료는 전문적인 행위로서 매우 큰 가치를 가진다고 인식돼 있고, 여기에 가격을 매기는 것은 천박한 행위로 여겨왔다. 많은 전문직업 중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직업은 오직 의사밖에 없다. 이러한 언어 관습은 의료에 대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이처럼 의료를 사적재로 보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국민정서상으로도 맞지 않는다. 또, 의료를 공공재로 구분하는 것에도 무리가 있다. 공공재는 비경합적이고 비배재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공공재는 어떤 개인의 소비가 다른 개인의 소비가능성을 감소시키지 않으며, 일단 공공재의 공급이 이루어지면 어떤 개인이 직접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소비에서 배제되지 않는 것인데, 한국 사회에서 의료는 그렇지 않다.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의해 의료를 공공재로 보는 데 합의하고 의료 공영화를 시행하고 있는 국가의 예를 보면, 누구나 경쟁없이 의료혜택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의료는 매우 한정적인 영역으로 제한되며, 의사들은 공무원의 신분이 된다. 그러나 건강에 대한 관심과 의료 욕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의료를 공공재로 보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일반적으로 의료는 가치재로 인식되는데, 이는 민간에서 공급되지만 시장논리만으로는 국민건강과 복지의 최적의 수준에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가가 일정부분 감당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 의료를 가치재로 보는 것이 의료윤리적 측면에서도 부합하나?

노먼 다니엘스라는 의료윤리학자는 정상적인 신체 기능은 인간에게 동등한 기회가 부여되기위한 조건이므로, 이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의료서비스는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상의 수준은 시장에 맡길 수 있다는 것으로 이 논리를 따라가다보면 의료 공급에 대한 이원화 체계와 양립 가능하다. 현대사회에서 의료는 하나의 영역으로만 구분짓기 어렵다. 예방접종·전염병·분만 등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의료행위와 성형 같은 선택적 의료행위, 적어도 두개의 영역으로 구분돼야 한다. 이럴 경우 필수 의료행위는 가치재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선택적 의료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대상인 사적재 성격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 가치재와 사적재 영역 구분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나?

그 논의는 노먼 다니엘스가 말하는 ‘정상적인 기능’의 기준이 사회 여건상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논의로 이는 공정한 절차를 거쳐 합의돼야 한다. 이 논의는 사회전체가 참여하는 공론장(public sphere)을 통해 이뤄져야 하며 논의에 참여하는 수요자와 공급자 각자에 요구되는 가치가 있다. 의료수요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연대성이다. 논의에 참여하기 전에 사회구성원간의 동료의식, 공동체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의료공급자에게는 공공성이 요구되는데 이는 개개인 의사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의사단체 차원의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가치재로서의 의료는 공급자에게 삶의 질, 안전성, 적정수준의 이익을 보장해주 면서 의료수요자들의 필수적 필요를 만족시켜주고, 사적재 영역의 의료는 시장논리에 맡기면 된다. 이 구분이 공론장을 통해 국민들이 합의한 것이라면 충분히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 공론을 통해서 합의된다면 의료의 영역은 두 개뿐 아니라 더 세분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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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현실 진료실에서부터 알려라
환자 개개인은 의사 신뢰…‘미세공론장’ 활성화해야


○…"지난 토요일에 몸살이 나서 동네의원에 갔었는데, 그 의사 선생님은 매주 토요일 오후 4까지 진료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의사들의 삶의 질이 낮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목광수 교수는 다른 환자들도 자신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환자들은 개인적으로는 의사들의 노고에 대한 연민과 존경심, 신뢰를 가지고 있지만 집단적인 관점에서는 의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목 교수는 의사들이 주장하는 의료현실의 문제점을 환자와의 면대면을 통해 설득해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의료의 가치는 최소한 가치재와 사적재의 두가지 영역으로 구분되지만 공론의 장을 통해 얼마든지 더 세분화될 수 있으며, 이것이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라면 더욱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목 교수는 '단 3분'간의 진료시간이라도 환자와 개별적으로 만나는 그 시간 중에 소통을 해야 한다고 했다. SNS 등 온라인상으로는 자기주장만 펼쳐서 제대로 된 소통이 안되므로 공감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한 참석자는 “공급자와 수요자만 공론에 참여하는 것은 미흡하다”며 행정부처도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목교수는 "거시적 공론장이 될 경우 여론의 방향은 엉뚱한 쪽으로 흐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목 교수는 정책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 정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국민이므로 미시적 공론장에서 의사의 입장을 설득해나가며 국민인식을 전환시키는 것이 정책을 바꾸는 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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