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원칙 따른 공평 부담·배분이 조건, 의료 영역은 취약계층 배려 필요…대화 통한 합의 필수

"건정심제도는 정의롭지 않아"
의료윤리연구회(회장 홍성수)는 지난 5일 오후 7시 대한의사협회 동아홀에서 '의료영역에서의 정의(Justice)'를 주제로 23번째 연구모임을 개최했다. 매월 첫번째 월요일 연구모임을 개최하는 의료윤리연구회는 지난달부터 '의사와 정의'를 주제로 강연과 토론이 진행됐다. 본지는 의료윤리연구회와 함께 '의료윤리 스터디'를 기획, 매월 둘째주 연구회의 강좌 내용을 중심으로 의료윤리의 주제들을 다뤄보고자 한다.
이날 '의사와 정의' 두번째 강의를 맡은 연세의대 의료법윤리학과 이일학 교수를 통해 의료에서의 정의에 대해 짚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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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료영역에서의 정의

- 정의란 무엇이고,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가?


우리는 정의에 인과응보적 보상의 측면, 최선의 결과를 위한 합리적인 분배, 계약과 거래의 보호, 공정한 절차의 수호, 약자에 대한 배려 등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똑같이 나누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에 따라 비례적으로 돌려주는 것을 정의라고 했다. 돌려준다는 것에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사회적 활동과 협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이기 때문에 필요하다. 공동활동은 협력을 통해 더 큰 성취를 이룰 수 있으며, 다른 사람도 나만큼 성실하게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무엇보다 내가 일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경험적인 신뢰가 바탕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정의로운 사회란 '공정한 원칙'에 따라 '공정한 부담과 배분'이 이뤄지는 사회다.

-의사가 정의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오늘날의 의료는 의사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인 활동이며, 따라서 정의가 실현돼야 하는 활동이다. 최종적인 권한과 책임이 의사에게 있지만 의사 한 사람만이 환자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의료진과 의료기관이, 그리고 의료체계가 환자를 돌보고 있다. 의료가 뿌리 내린 지식과 기술이(학문연구),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자원(건강보험)이 사회적 협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 최근 우리사회에서 '의료 민영화'와 '무상의료' 이슈가 동시에 대두되고 있다. 정의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정의는 사회적 협력에 참여한 사람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건강'은 모든 사람에게 처음부터 평등하게 주어지는 조건도 아니고, 불법 이민자, 장애인, 수감자, 노인처럼 보건의료를 필요로 하는 집단은, 이런 협력에 참여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사회는 이들을 배려하는 시스템을 발전시켰지만,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은 이들을 자선의 수혜자로 여기고 이들을 돌보는 데 일정한 선을 그으려고 한다. 정의의 관점은 이런 소외된 계층 문제를 쉽게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흔히 건강문제를 해결하는 데 인용되는 정치철학(사회계약론적 이해)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적이고 공동의 이익을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서로 주는 것 만큼 받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대등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 되지 않는 것은 문제점으로 꼽을 수 있다.


- 현재 사회보장 측면에서의 의료서비스 확대 논의가 의사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정의의 측면에서 볼 때 어떤 문제 때문인가?

의사들이 보건의료를 사회적 협력물로 보기 보다 개인의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서비스로 인식한다. 정의는 사회적 협력의 산물을 나누는 원칙을 세우고 실천하는 문제다. 그리고 여기에 관련된 사람이 가능한대로 자기 견해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의사들은 의료서비스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사회로부터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인식하고 있고, 따라서 의사들이 생산하는 서비스는 의사의 재산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것을 더 많이 나눠준다는 것은 부당하게 자기 권리를 침해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사회마다 정의의 특정 요소를 특히 강조하기도 한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의료분야의 정의가 확립되려면 어떤 부분이 강조돼야 하나?

의료가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부터 이뤄져야 한다. 공동의 목표와 달성 수단에 대해 대화로 합의해야 한다. 의사들이 환자와 다투기보다는 환자의 대변자로 활동하는 전략도 고려해야 한다. 공단으로 대표되는 정부와의 관계 설정이 문제로 제기되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문제까지 다룰 만큼은 아직 정의에 대한 이론이 구체적이지 않다. 우리 사회에 대한 이해, 보건의료서비스가 제공되는 방식에 대한 논의, 건강의 범위까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공론의 기회가 반드시 필요하다.

- 의사와 환자, 의사와 국가간에 의료의 정의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대화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대화에는 조건이 있다. 합의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관련자가 자신의 욕구나 현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부분이 현재 부족하다. 또한 각자의 요구 조건과 그 이유를 밝혀야 하겠지만 다른 무엇보다 의료서비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협력의 결과를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협력을 통해 얻게 될 것, 과정에서 치러야 하는 대가가 명확해야만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규칙(rule)을 찾을 수 있다.

이 교수는 정의의 구현은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들의 필요를 어떻게, 무엇으로 채워줄 것인가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정의는 냉철한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관용적인 이념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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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정심제도는 정의롭지 않아"

절차적 정당성 결여…당사자 의견 반영돼야

○…이날 참석자 중 한 개원의는 우리나라 의료수가계약에 있어 절차적 정의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의료 공급자의 입장에서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의 위원 구성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일학 교수는 "국가가 정책 결정을 할 때 최소한 그 절차라도 합리적이면 정의롭다고 평가받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형식적으로는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고 있는 반면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며 건정심의 정의롭지 않은 측면에 동의했다.

이 교수는 합리적 절차라고 인정받으려면 반대의사가 반영될 기회가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책 결정이 나온 이유가 납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것이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돼야 한다는 것이다.

또 납득하지 못하는 측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기전이 마련돼야 하고, 불합리하다는 점이 입증되면 정책 수정이 가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이 최소한 보장된 후 내려진 정책 결정은 공정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했다.

문제를 제기한 참석자는 정부의 일방적 결정은 정의롭지 않다며. 건정심 제도에 대해 의사들이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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