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간질환이 심해졌다. 복수가 차고 황달이 심해져 거동은 고사하고 호흡조차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에 갔지만 돌아온 대답은 '더 이상 방법이 없다'였다.
 온 가족이 눈물을 삭히며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그럴 수 없었다. 생면부지 동네 의원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가더니 의사를 붙잡고 매달렸다. 어머니의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의사라는 업을 가진 이의 소명의식이었을까. 그 의사는 진중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진찰하고 치료하더니 진료실 베드에 눕히고 밤새도록 그 옆을 지켰다.
 내일 아침 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른다. 그렇지만 중학생 아들은 어른이 되면 오늘밤 아버지의 곁을 지킨 의사 선생님과 같은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가슴 깊이 새긴다.


"환자 곁을 지키는 의사가 될래요"
 
이준상(서울 이준상 내과의원) 원장의 중학생 시절 이야기다. 이 원장의 아버지는 그날 밤을 무사히 넘기고 기적처럼 병세가 완화돼 건강한 삶을 지내시다 작년 4월 고령으로 작고했다.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그 선생님의 얼굴도 기억이 안 나요. 제주도로 옮기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찾을 길이 없네요. 의사가 돼 꼭 한번 찾아뵙고 싶었는데…."
 
까까머리 중학생의 가슴 속에 '의사'라는 이름이 꽉 들어찬 이후 그의 꿈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이 원장이 대학입시를 치를 때 일이다. 학력고사 세대인 이 원장이 대학에 진학할 때는 한 학교에서 다른 학과를 1지망, 2지망, 3지망으로 선택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의사가 아닌 다른 길은 몰랐던 이 원장은 망설임 없이 1, 2, 3지망 모두 '의대 의예과'를 쓰는 호기를 발휘했다. "면접 때 학장님이 이 성적으로는 의대에 떨어질 것 같은데 다른 학과를 지원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하시더군요. 망설임 없이 떨어지면 재수할 거라고 대답했죠. 알고 보니 학장님이 제 의중을 떠보느라 거짓말을 하신 것이었어요. 물론 성적은 좋았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족들이 힘들긴 했지만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난 거니까 제겐 큰 행운이었죠."

대화하는 병원, 의사가 노력해야
 
이 원장의 환자들은 다소 긴 대기시간을 감수해야 한다. 대신 긴 진료시간, 명쾌한 설명, 기분 좋은 웃음으로 서운했던 마음을 보상받기 때문에 불만스러운 사람은 없다.
 
"우리나라 병원에는 '대화'가 없잖아요. 대학병원에서 십년 넘게 약을 먹던 환자가 자신의 병명이 무엇인지 모르더라고요. 대형병원, 종합병원 일수록 이런 사례가 많죠. 자신의 병명도 모르고 무작정 약 지어달라고 하면 참 답답해요. 초상집에서 밤새 울었는데 누가 죽었는지 모르는 상황과 같은 거죠."
 
고혈압, 당뇨병과 같은 만성질환자들이 많은 까닭에 이 원장은 나름대로의 '설명법'도 고안해 활용하고 있다. 듣다보니 이보다 명쾌한 설명과 적절한 비유가 없을 듯하다.
 
"고혈압 환자들이 혈압측정 외에 심장이나 혈관검사를 하는 것을 잘 이해 못하거든요. 이럴 땐 혈압을 수도에 비유해 설명하면 이해가 빠르죠. 정수장에서 강물을 정수해 수돗물로 만들어 배수펌프장으로 보내잖아요. 이 물이 수도관을 통해 각 가정에 수돗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수압이 생기죠. 수압은 혈압이고, 수도관은 혈관이고 수돗물은 혈액에 비유해요. 배수 펌프장은 심장이고 정수장은 간과 콩팥이고요. 수압이 아무 여건 없이 스스로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 시스템의 연관성을 설명하고 검사의 필요성을 말하면 이해를 잘 하죠."
 
생활 속에서 환자들이 접할 수 있는 상황에 적절하게 비유를 해 설명을 하니 족집게 선생이 따로 없다. 질환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적용해 설명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터.
"전 좀 힘들죠. 연구를 많이 해야 해요. 하하."

노인 위한 전문내과병원 구상 중
 
어린 시절 가슴 속에 품었던 의사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이 원장이지만, 아직 그의 꿈을 다 이룬 것은 아니다. 환자들을 보며 한 가지의 꿈이 더 생겼다.
 
"기존의 노인병원이 아닌 노인내과 전문병원을 운영해보고 싶어요. 뇌졸중, 심장질환 등 성인병에 관련된 질환을 모두 볼 수 있도록 신경과, 내과 등 내과 파트 전문의들이 상주하는 병원이요."
 
노인인구가 많아지면서 이들을 위한 전문적인 의료기관의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지만 눈앞의 수익이나 제도적인 문제로 환자 수백 명에 촉탁의 한 사람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노인내과 전문병원을 구상한지는 십년 정도 됐는데 생각만으로 실천하기 쉬운 꿈은 아니죠. 아직은 여건도 안 되고 재력도 없고요. 그동안 두 번 정도 부지를 기증할 테니 좋은 일에 써달라는 분들이 계시긴 했는데 결국은 잘 안 됐어요.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면 다시 좋은 기회가 올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해외 오지에 분원…의술·사랑 나누고파
 
노인내과 전문병원 외에도 설계를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또 한 가지 있다. 이 원장은 매년 여름 교회와 함께 3~5일 간 태국과 필리핀 등 병원이 없는 오지마을에 의료봉사를 떠나는 것으로 여름휴가를 대신한다. 매년 실천하는 것도 대단한데 이 원장은 자주 가지 못하는 미안함이 앞선다고 한다.
 
이들에게 지속성 있는 진료를 제공하기 위해 현지에 분원을 세우고 현지 의사를 고용해 우리나라의 치료 노하우를 나누고 거기서 창출되는 이익을 무료진료에 사용하고 싶다는 것이 이 원장의 생각.
 
"동남아에 고혈압 환자들이 많아요. 진료 후 한 달 분량의 약을 주는데 돌아오는 마음이 편치 않죠. 요즘은 현지 신학교 선교사에게 일 년치 약을 주고 환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복약지도를 하도록 했죠. 현지에서 문제가 있을 시 저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치료방향을 결정하고요. 제 전화는 언제나 'on call'이거든요. 현지에 분원이 만들어지면 보다 지속성있는 치료가 이뤄질 수 있을 텐데요."
 
어린 시절 밤새 아버지의 곁을 지켰던 의사의 모습을 가슴에 새기고 그 꿈만을 보며 달려왔다. 의사라는 꿈은 이뤘지만 아직 못 이룬 꿈들이 많다는 '꿈꾸는 의사 이준상'. 그의 꿈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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