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보건의료계에 희망이 있는가? 새해벽두 이처럼 무거운 주제를 던진 것은 "각 정책들이 갈수록 의사들을 옥죄고 있다"는 푸념이 단초가 됐다.
그러나 과거와 현실을 정확히 살펴본다면 내일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이 코너를 기획하게 됐다.
오랫동안 외국서 연구와 진료를 하면서 '석학'으로 불리는 대한민국 의사들의 눈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편집자>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중요

국립암센터 이진수 원장은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1979년 미국으로 건너가 내과전문의·종양내과전문의 자격 취득후 1984년부터 2001년까지 MD앤더슨병원에서 흉부와 두경부종양내과에서 근무했다.
 
이 기간은 연구와 진료에 있어서 최절정기. 'The Best Doctors in America(1994년)', 'Top Cancer Specialists(1994)', 'America's Top Doctors(2000)'에 선정되며, 최고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러던 그가 2001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국립암센터 초대원장이던 박재갑 교수의 러브콜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국립암센터는 그가 생각하고 있는 환자 진료 방침들을 속속 반영했다. 진료과를 없애고 암종별로 센터와 팀을 구성, 다학제적 개념을 도입 운영한 것은 사실상 이곳이 우리나라에선 처음이다.

10년이 지난 국립암센터는 그동안 RET유전자 검사용 마이크로칩 개발, 세포주기 조절 단백질 BubR1의 이상에 의한 암세포 형성 기전 규명, 소세포 폐암의 새로운 치료법 개발, 최소형 복강경 수술로봇 개발, 항암 방사선 병합치료 후 직장암 복강경 수술 안전성 및 효과성을 세계 최초로 입증 등 다양한 성과를 냈고 그 중심에 이 원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규제가 발목 잡고 있는 사회

이 원장은 대한민국 보건의료체계에 박수를 보낸 적도 있지만 미국과 비교할 경우 규제가 너무 많다는 점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선진국은 신용사회'라는 점에서 아직 나갈 길이 많다고 봅니다. 양심에 따라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의료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각종 규제로 인해 많은 부분 멈춰야 할 때가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반면 이러한 환경의 빌미를 제공한 일부 의사도 반성할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그는 특히 우리 사회가 '원칙'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일본 방문을 했을 때인데 일행이 1명더 늘었어요. 9명의 의사를 픽업하기 위해 공항에 온 운전자는 9인승 차량으로 9명을 태워야 한다고 했고 우리는 어떻게든 1명도 함께 이동하자는 주장을 했습니다. 운전자의 '원칙론'이 맞았죠."

그는 원칙을 벗어나면 단기적으로는 비용이 덜 들지만, 사회적 비용을 감안하면 결국 원칙을 지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일부에선 융통성이 없다고 지적할 수 있으나 이런 원칙은 글로벌 시각에서 보면 기본 중의 기본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당연한 이치를 알고 감사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여기에는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한 예를 보자. 최근 몇 년 전까지 암 환자는 입원시 본인부담금 20%, 외래 50%였다. 이런 사실들을 안 환자들은 외래 대신 입원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입원을 당연시하고 있다. 암치료에 있어선 (비급여 제외) 엄청난 보장을 하고 있다. 그러니 환자 입장에서는 국가에 감사할 일이다. 문제는 지속가능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는 이러다 재정이 파탄나고 나라가 망하면 어찌할 것인지 되물었다.

외형은 커졌지만 내면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지금은 고층아파트에 주거환경이 좋아지고 굶는 사람이 없어 '식사하셨습니까'라는 옛날식 인사는 안한다. 오히려 운동을 하고 있느냐는 물음이 더 많다. 자기 일을 하면서 여가선영을 해야 하는데 아예 목적이 여가선영으로 바뀌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한다.

영양 과다시대 성인병 홍수

현대의 병은 상당수 많이 먹어서 생기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당뇨병, 뇌졸중, 심장병등 성인병들이 다 그렇다. 영양 과다 시대, 음식과 소비패턴이 달라지면서 생기는 것이다.

그동안 진단을 못하거나 찾지 못한 때문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작은 부분이다. 새로 생긴다고 보는 것이 맞다.

암은 초기에 발견하면 만성병과 같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6개월을 못산다는 급성 백혈병도 지금은 치료가 가능하다.

"이제 암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합니다. 암은 불치의 병이 아니라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오래 살게 되면 생기는 병이자, 오랜 시간에 걸쳐 유전자 변화에 의해 생기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충분히 예방 가능한 만성병이자 초기에 발견하면 십중팔구 완치가 가능한 병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이 원장은 '윈·윈'보다 '윈·윈·윈'을 강조한다. 윈윈인 상생이 아니라 상생과 공동체 또는 국가가 모두 윈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우리나라 과학분야 1년 연구비 16조원을 모두가 1%씩만 아끼면 1600억원이 확보되는데, 그러면 이 비용으로 6~7년 후 신약개발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수출할 수 있는 상품 개발이 목표가 아니라 1등을 하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것이 의료계가 나갈 길이라는 이 원장의 눈빛은 어느때보다도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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