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봉직의의 절규

급여 못받고 대출금액 떼이고 하소연할 곳은 없고…

10여년간 근무하면서 일부 대출도 해준 병원이 어느날 갑자기 공중으로 사라졌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런데 그 병원장이 또다른 병원 개원을 준비하고 있고, 자신과 같은 피해자를 양산할 것만 같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A병원에 봉직의로 근무하던 이씨의 온라인 제보는 병원과 함께 동고동락해 온 잃어버린 시간, 그리고 약간의 투자금액에 대한 아쉬움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또다른 선의의 피해자, 특히 후배의사들이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A병원은 인근에서 유일하게 응급 입원병동이 있다는 이유로 지역 내에서 자리잡았다. 의료기기, 제약업체의 증언에서도 몇 년간 한창 거래량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환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씨는 법원에 회생신청을 하면서 병원 내부관리에 소홀해지고 더욱 경영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추측했다.

이씨는 "병원이 어려워지자 대출을 알선해준 은행의 반강제에 의해 회생 신청을 했다"며 "여기서 병원의 투자금을 노린 원장이 친척인 이사장과 짜고 회생을 막았으며, 결국 재판에서는 폐지됐다"고 설명했다.

회생이 성사되면 원장과 이사장이 경영권을 쥐지 못하고 법원이 지정한 제3자의 법정관리인 체제에 들어가게 된다. 이 때 원장단이 저축은행으로부터 불법(?)대출을 받아 중간에 업체를 끼고, 회생에 대한 반대(부동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을 만큼 채권을 사들인 것으로 이씨는 보고 있다.

그는 "회생이 폐지되면 병원 경영상 문제가 발생해도 구제받을 수 없으므로, 일부 채권자들이 자신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법원에 파산신청을 했다"며 "회생 폐지가 되자마자 원장과 결합해 채권을 사들인 업체가 법원에 임의경매를 신청, 입찰해 병원 매각이 결정됐다. 채권으로 경매금액을 부담하는 방식으로 지불했다"고 부연했다.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없이 병원이 부도처리되는 동시에 경매를 통해 원장단 측근에 넘겨졌다는 주장이다. 이씨는 이를 고의부도라고 칭하면서 "채권이 하루아침에 알 수 없는 업체로 양도됐으며, 저축은행에서 불법(?)대출을 해주는 바람에 채권자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갔지만 법적인 구제를 받지 못했다"고 호소했다.

이후 의료장비 전체를 B병원으로 매각하기로 했다는 법원의 판결이 이어졌다. 이씨는 "B병원은 같은 자리에 간판만 바꿔달은 병원이며, 이전 원장이 병원에 상주하면서 병원 내부 공사와 직원을 구하고 있다"며 "이미 앞서 서울에서도 한차례 고의부도를 냈으며, 같은 수법으로 약 230억의 피해액을 만든 경영진이 다시 병원을 접수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현재까지 같이 근무했던 직원 70~80명이 일부 급여를 받지 못했으며 이씨처럼 병원에 돈을 빌려주고 못받은 40여명에 달하는 채권자의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닌 상황. 이씨는 B병원이 오픈하면 또 누군가가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을 것으로 우려했다. 그는 "A병원 원장이자 B병원 원장이 의료계 사이트 등에 구인공고를 올리고 있다"며 "철저히 익명을 보장하되, 이런 부도덕한 병원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창구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출금을 받지 못해 개원마저 쉽지 않은 그는 다른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봉직의 신분이기 때문에 이전 병원에 대한 이의제기가 부담스럽더라도 B병원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씨는 "또다른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최대한 알리고 싶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며 "그저 법적 상식을 쌓고 충분한 검토를 거친 뒤 원장직을 맡거나 초빙에 응하라고 말해줄 수 밖에 없다"며 씁쓸해했다.

업체 피해도 상당수…알고보니 사무장병원?

김씨와 같은 피해자는 개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의료기기, 제약업체 등도 포함됐다. 대법원사이트에서 A병원 소송 사건번호를 확인한 결과, 채권자 명단에는 다수의 업체가 들어있었다. 판매대금을 받지 못하거나 사용료 등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였으며, 검사의뢰를 받는 업체나 EMR 업체도 들어있었다.

물론 초기 투자를 해준 업체도 있었다. 투자에 참여했던 C업체 관계자는 "구체적으로 얼마를 손해봤는지 밝힐 수는 없다"며 "다만 초기에 병원이 병상도 꽤 규모를 갖추고 시작하는 만큼 장비 구입 조건으로 일부 투자를 한 것이 있다"고 전했다.

다행히 D업체는 중간에 업체가 채권을 사들일 때 채권을 팔게 됐다. D업체 관계자는 "A병원과의 거래가 최근에는 뚝 끊길 정도로 병원이 잘안되는 걸로 알고 있지만, 부도난 것은 몰랐다"며 "개인의원이 아닌 200억원 규모에 달할 정도의 법인 부도라면 흔하지 않은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피해자로 추정되는 이들을 뒤지다보니 또다른 제보도 받을 수 있었다. 이 병원이 사실 사무장병원이라는 것이다. A병원과 오래 거래해온 박씨는 "이 병원 건물주가 사실 의사가 아니며 일부 병원 수익을 노리면서 바지 원장과 이사장을 고용한 사무장병원 형태"라며 "그런데 건물주가 수익을 제대로 챙겨받지 못하고, 원장단이 수익을 횡령하는 일이 포착되면서 소송을 제기하다 원장단에서 손을 쓴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사무장병원이 문제가 있지만, 원장단은 이 사무장병원의 특성을 잘 알고 이를 역으로 이용해서 적은 자본으로 채권을 사들이고 병원을 사들이는 수법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라며 "업체나 의사, 건물주 모두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았지만, 별다른 구제방법이 없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단, B병원이 오픈하면서 또다시 투자나 거래를 요청할 때 이를 잘 확인할 것을 조언했다.

의협에서도 법적인 소송이 끝난 만큼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단언했다. 의협 관계자는 "이런 사례가 비일비재하며, 법적인 판결이 끝났을 경우에는 단순히 피해자의 말만으로 고의부도라고 단정짓기 어렵다"라며 "정말 피해자가 많고 피해 확산이 우려된다면, 피해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공론화시켜야만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피해를 입은 이들은 많지만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지키는 것은 자신 뿐이라는 안타까운 제보로 결론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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