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현장 내러티브에 주목…고통받는 상황 이해해 환자 중심 치료 가능

의료 행위는 최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한다. 따라서 환자의 현재 건강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따른 고통이나 감정 같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환자에 대한 진정한 공감과 이해를 다했다고 볼 수 없으며, 환자중심의 의료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환자의 이야기를 담은 "내러티브(narrative)"를 통해 환자중심에 한층 더 다가서기 위한 시도가 싹트고 있다.
 지난 17일 열린 대한의료커뮤니케이션학회 가을철 학술대회에서는 "의료와 내러티브"라는 이색적인 주제를 통해 내러티브의 필요성과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환자와의 신뢰관계 형성에 도움
 
내러티브를 통한 의료는 환자에 대한 공감 능력을 향상시키고 신뢰관계 형성에 도움을 준다.
 
서울대 간호대학 이명선 교수는 "내러티브 연구를 통한 질병의 이해" 발표를 통해 "환자는 특정한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신에 관한 질병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이 곧 "질병 내러티브""라며 "질병 이야기에는 많은 이유와 설명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의료인들이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일깨웠다.
 
효과적인 통증 관리는 통증 정도를 평가하고 약물을 투약하는 것 이상이지만 무엇이 효과적인지는 알 수 없다. 이를 위해 통증관리 이야기를 듣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환자가 매일 집에서 통증을 관리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수행하면서 펼쳐지는 갈등과 어려움을 느끼고 이를 치료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의대생 대상의 "당뇨이야기" 교육에서도 효과가 확인됐다. 환자 중심의 돌봄을 교육하기 위해 당뇨병환자의 내러티브를 이용 당뇨병과 관리의 이해를 돕게 했다. 교육을 통해 강의에서 배운 과학적 지식이 아닌, 환자들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이 교수는 "당뇨이야기를 통한 배움은 환자중심의 당뇨병 치료를 가능하게 하며, 의사로 발전하는 동기부여를 통해 의사의 역할에도 영향을 주었다"며 "내러티브는 환자의 질병 경험이 의료에서 왜 중요한 지를 일깨우는 동시에, 환자중심 의료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고 있다"고 시사했다.
 
▲의사·환자간 인간적인 교류 실현돼야
 
"멋지게 쌓아올린 인생의 탑, 신체와 정신 모두가 항암치료로 와르르 무너져가는 어머니. 실제로 이런 상황이 누구에게나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갑작스런 병으로 무너져 가는 환자도 정말 많겠지요. 환자를 상상하면서 스스로 우울해지기도 했지만, 고통받는 환자들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환자의 심정을 마음깊이 다가가 이해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가 됐습니다."
 
제주대병원 종양내과팀 약 20명은 한 달에 두번 환자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직접 쓴 짧은 산문이나 시를 발표한다. 글쓰기에 익숙치 않은 의료인들도 상당한 수준의 문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의료인간의 협력을 높이고 환자에 대한 보살핌을 강화하는 등 치료에 있어서도 긍정적인 효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처럼 내러티브는 이미 드러나 있는 의료의 한계점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제주대 의전원 의료인문학교실 황임경 교수는 내러티브의 글쓰기 형태인 서사를 언급하며 "현대 의학은 오로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언어체계 내에서 주관과 감정을 모두 배제시키는 권위적인 서사일 뿐이며, 그 결과 환자와 의사간 인간적인 교류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서사를 통해서라면 단순 의학의 질병 개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질병 체험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질병이 몸, 시간, 자아의 측면에서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 사건인지 이해할 수 있게 만들며, 특히 투병기는 질병을 겪어 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사에게 더욱 유용하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의료인의 주관이 의학에서 멀어질수록 현대 의학은 더욱 더 비인간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며 "이야기를 통해 환자들은 질병 체험을 풀어내고, 병실에서나 수술실 어디에서나 나눌 수 있는 그 환자들의 삶의 이야기를 의학과 의사들이 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질병체험 내러티브" 데이터베이스 구축 중
 
질병체험 내러티브는 환자의 활용과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위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단계에 와있다.
 
서울대 인문대 우상수·정수정·진정근·황은미 교수팀은 "질병체험 내러티브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다학제적 연구" 발표를 통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질병체험 이야기 DB 구축 연구에 대해 소개했다.
 
이는 한국인에 자주 발생하면서도 개인의 삶과 가정생활, 사회적 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당뇨병, 유방암, 위암, 우울증, 치매, 호스피스 등 6가지 질병 유형에 해당된다.
 
일단 환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동영상과 음성자료를 확보하는데, 학술과 교육적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KRM) 웹사이트에 게재된 텍스트는 보다 공신력을 갖고, 여러 분야 연구를 위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현재 고려대 구로병원, 단국대병원과 함께 공동 작업 중에 있다.
 
우 교수팀은 "의학, 간호학, 사회과학, 인문과학 등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증적인 교육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며 "동시에 질병을 경험하고 있는 환자와 환자 가족을 위한 정서적 지지망 구축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동일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국제적인 협력기구가 조직돼 있는 만큼, 문화 간 질병체험의 비교연구 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다. DB 구축은 영국 옥스퍼드대학 연구팀에 의해 시작돼 세계적으로 10개국에 확산 됐으며, 한국은 세계에서 4번째로 당뇨병에 대한 질병체험 내러티브 첫 모듈을 완성한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우 교수팀은 "환자의 질병체험에 관한 이야기를 공개함으로써 사회공익적 차원에 기여하고, 각 학문영역의 연구에 기초자료를 제공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며 "환자와 가족들이 다른 사람의 질병체험 내러티브를 통해 질병극복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의료인에게도 환자중심의 의료활동을 펼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할 것"으로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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