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대한민국 의료정책에 '중소병원'이 보이지 않는다. 대형병원은 막강한 자본과 규모를 앞세워 승산없는 경쟁으로 중소병원을 내몰고 있고, 숨 돌릴 틈 없이 급변하는 의료환경은 중소병원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중소병원, 희망은 없을까? 이에 본지는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한계를 극복한 작지만 강한 병원, 대한민국 강소병원을 찾아 희망을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3無 지방의료원 해법은 "진심과 신뢰"

취임 후 노조위원장과 병원 상생안 마련
의사·직원도 동참…부임 4년여 만에 경영 정상화
최신시설·우수인력 영입에 투자…파주병원 제2막 열어


경기도의료원 파주병원(원장 김현승)은 2005년 7월 지방공사 금촌의료원에서 경기도의료원 산하 병원으로 합병, 현재 300병상 규모에 14개 진료과를 갖춘 경기도 최북단 파주시 유일의 종합병원이다.
 
또 여타 시·도립병원들과 다르게 전문의만 23명이며 특히 내과전문의가 5명이나 포진해 지역민들의 든든한 주치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지역민은 물론 병원 직원들조차 이용하지 않는 철저히 외면 받던 병원이었다.
 
모두가 포기한 병원서 '제2의 인생'

"한마디로 이 병원 직원들조차 의료진과 병원을 믿지 못하고 이용하지 않았어요. 폐가와 다름없는 점점 잊혀져가는 병원이었죠." 김현승 원장은 2007년 4월 부임 당시 파주병원의 상황을 이처럼 말했다.
 
연세의료원에서 심장내과 전문의로 30년 세월을 환자와 함께 하고 강남세브란스병원 부원장으로 경영 일선에서도 활약한 후 정년퇴임했다. 그리고 식지 않은 의사로서의 열정을 쏟아보고자 파주병원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처음 병원에 왔을 때의 충격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고.
 
김 원장의 가훈이자 65년 긴 인생을 살며 지켜온 신념은 '최선을 다하자, 정직하자, 예의를 다하자'이다. 모두가 포기한 병원이었지만 일생의 신념에 따라 병원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했다. 자다가도 병원 생각에 벌떡 일어나고, 24시간이 부족할 만큼 직원들을 면담하면서 곪은 구석을 하나하나 찾아 가기 시작했다.
 
마음을 여니 노조가 손 잡아줬다
 
김 원장이 도지사에게 사령장을 받으면서 들은 제일성은 "부디 노조와의 관계를 탈 없이 해달라"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임 원장 2명이 노조와의 불화로 쫓기듯 병원을 떠났기 때문이다. 경영악화로 임금체불이 반복되고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노조와의 갈등은 날이 설만큼 서 있었다. 김 원장은 노조위원장과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 머리를 맞대고 병원의 살 길을 모색했다.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 점점 서로의 마음이 열리고 노조가 김 원장의 진정성을 알겠다며 주도적으로 상생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도출된 '노사합의안'은 전 직원의 임금 인상분과 5급 이상 직원의 3개월 임금 반납, 전 직원 남은 연가 반납, 동절기 연장근무 수당 반납 등 첨예했던 노사관계의 틀을 깨는 내용들이었다. 더군다나 사측이 아닌 노조에서 주도적으로 만든 안이란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의사 지키려 직원들 월급까지 반납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작년 11월부터는 직원들의 월급을 제대로 줄 수 있을만큼 경영이 정상화됐다. "적자가 심각해서 전직원의 월급을 80%만 줘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노조에서 직원들의 월급을 반납 할테니 의사들의 월급을 보전하라고 제안했어요.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 이유는 의사들은 주인의식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지방의료원에 그저 조건이 좋아서 온 이들이기에 그 '조건'이 흔들리면 내일이라도 떠날 사람들이라는 것. 그러나 의사들이 동요되고 진료 공백이 생기면 병원의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라며 용단을 내린 것이다.
 
"순리적으로 더 많은 돈을 받는 의사들이 양보하는 것이 맞는데 노조와 직원들이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아 의사들의 월급을 보전했죠. 그러자 의사들도 자신들의 월급 일부를 내어 임금을 반납한 직원들의 생활비를 지원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파주병원의 이러한 자구노력을 경기도에서 인정해 병원 신축을 위한 310억 원의 출자금을 지원하게 되고, 50년 역사를 뒤로 하고 잊혀질 뻔한 파주병원이 제 2의 탄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병 잘 고치는 병원'이 기본돼야
 
최근엔 복지부의 시·도립병원 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얻어 기금을 지원받아 최신형 3.0 MRI도 구입하는 등 장비 교체도 시작됐다. 가장 어려울 때 경기도와 정부의 지원을 받아 건물을 신축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발돋움했지만 아직도 김 원장의 눈에는 아쉬운 점들이 많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지원을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도의 재정 중 부동산 거래세가 차지하는 부분이 큰 데 최근 4~5년간 부동산 침체로 인해 도의 세수원이 막힌 상태기 때문이다.
 
이제는 병원이 스스로 일어서야 할 때. 김 원장이 병원의 자생력에 중점을 둔 부분은 우수 의료진이다. 이는 월급을 양보하며 의사들을 지킨 직원들의 뜻이기도 하다. 병 잘 고치는 병원, 친절한 병원, 설명 잘 해주는 병원, 깨끗한 병원, 이용하기 편리한 병원, 자랑스러운 병원을 핵심가치로 삼고 그 중 병 잘 고치는 병원을 최우선으로 실현하기 위해 의료진 정비에 나섰다. 민원이 많고 근무가 불성실한 의사들은 더 이상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최고가 될 수 있는 우수한 의사들을 발로 뛰며 영입, 절반 가까운 의사들이 교체되면서 병원에 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김 원장은 오히려 의사들은 임금 조정이 탄력적으로 가능해 영입이 수월한데 반해 전국 의료원이 임금을 동결한 간호사들의 경우엔 인력난이 심각하다고 털어 놓는다. 실제 현재 신축한 건물 중 3층 병동은 간호사 부족으로 문조차 못 열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기도 한다.
 
지방의료원 살길 적극적으로 찾아야
 
지방의료원은 공공병원이기에 공공성과 수익성,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보니 어려움이 적지 않다. 그러나 김 원장은 수동적으로 대처하기보다 먼저 적극적으로 방안을 모색하고 실천하다 보면 길이 열린다고 말한다.
 
파주 지역 의료 취약층 뿐 아니라 관내 민간통제구역인 대성동, 통일촌, 해마루촌 및 개성공단까지 직접 가며 의료봉사를 하는 김 원장. 인터뷰 다음 날도 의료봉사를 위해 카자흐스탄으로 떠난다는 그는 퇴직 후 고향인 파주에서 의사로서의 소명을 다할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단다.
 
"지금 대학에서 정년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도 퇴직 후 의료인으로서의 경험과 지식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힘이 닿는 데까지 도움을 주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진료도 보고 병원살림도 하려니 힘은 들지만 보람은 몇 배로 큽니다." 김 원장 뒤로 보이는 빽빽한 월간 일정표가 그의 아름다운 열정을 고스란히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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