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침 난립·영역중복 등 문제속출…통합적 접근 우선돼야

정부 산발적 지원…진료지침 홍수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주요 국가들이 임상진료지침을 주요 정책 과제로 다루며 지침의 유용성과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임상진료지침 개발과 확산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임상진료지침 개발에 대한 관심은 불과 몇년전에 시작됐다. 여기에 붕어빵 진료를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의료계가 소극적 태도를 보이자 정부가 개별 학회나 연구자에게 산발적으로 개발 연구를 지원하는 형태로 출발했고, 이로인해 중복 지원과 지침 개발 난립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복지부가 운영하는 임상진료지침 관련 사업은 "국가임상연구센터" 사업과 대한의학회에 용역을 준 "임상진료지침 개발" 사업이 있다. 또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한국보건의료연구원도 임상진료지침을 주요 사업에 포함시켰다.
복지부가 운영하는 "국가임상연구센터" 사업은 전국에 총 12개 임상연구센터를 선정해 임상진료지침개발을 위한 연구를 진행하는 사업으로 2004년부터 현재까지 360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이보다 후발주자로 시작된 사업은 복지부가 대한의학회에 용역을 준 "임상진료지침 개발" 사업으로 2006년부터 매년 1억원의 지원을 받아 현재까지 4개 분야에 대한 지침을 만들었고 웹상에 임상진료지침 정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보건의료연구원도 임상진료지침을 개발 하겠다고 밝혀 그야말로 지침의 난립 현상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선희 이화의학전문대학원 예방의학교실 교수(대한의학회 의료정책이사)는 "최근 지침개발의 난립과 우선순위의 타당성 문제, 개발영역 중복 문제, 진료과목 간의 영역다툼 문제가 표출되고 있다"며 "개발주체나 개발비용의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웹사이트 이용도 턱없이 부족
복지부가 임상진료지침 개발과 보급을 효과적으로 지원하도록 한다는 취지하에 질병관리본부가 운영하는 임상진료지침 웹사이트(http://ncrc.cdc.go.kr/guideline)는 대한의학회가 복지부 지원을 받아 운영하고 있는 임상진료지침 정보센터(www.guideline.or.kr)와 유사한 사업이다.
양 사이트의 이용현황은 어떨까?
대한의학회 임상진료지침 정보센터는 일일 방문자수가 4일 오후 6시 현재 26명으로 누적 방문자수는 1만3916명이다. 2008년 1월 사이트를 시작했으니 하루 평균 30명 남짓이 의학회 임상진료지침 정보센터를 방문하는 꼴이다.
질병관리본부 임상진료지침 웹사이트는 일일 방문자수가 공개되지 않았다. 이 사이트를 관리하는 질병관리본부 당담자는 "일일 방문자나 누적 방문자 수는 전산실에서 파악하고 있으나 공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다소 편협할 수 있지만 자료실에 올라온 조회수로 보자면 가장 많은 건수가 임상진료지침 웹사이트 147건, 의학회 임상진료지침 정보센터 150건으로 엇비슷한 수준이다.
단순한 수치 비교를 떠나 짚고 넘어갈 부분은 양 사이트 모두 임상진료지침 보급이라는 측면에서 턱없이 부족한 활용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모 대학교수는 "웹사이트 활용이나 임상진료지침의 제대로 된 운영과 파급 효과를 기대하려면 정부의 지원이 분산되지 않고 집중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임상진료지침 개발 주체가 혼선을 빚고 있는 부분을 정리하고 아울러 전문가 단체의 역할 재정립도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재정적 후원자 역할로 충분
실제 국가임상연구센터에서 개발 중인 지침에는 이미 의학회에서 개발해 보급하고 있는 지침인 우울병이나 당뇨병 지침이 포함됐다. 동일한 질병에 대해 중복지원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복지부가 추진 중인 "근거창출임상연구국가사업단(NSCR, National Strategic Coordinating Center for Clinical Research)"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NSCR은 복지부가 2004년부터 운영한 국가임상연구센터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자 마련한 개선책이다.
복지부는 앞서 지원 중인 질환별 임상연구센터와 임상연구지원센터, 근거창출 선진의료기술개발 연구 등을 통합·운영할 계획으로 사업단 주관연구기관으로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을 지정했으며 최근 사업단장 공모를 냈다.
의료계는 궁극적으로는 NSCR의 지침이 건강보험 급여심사에 이용될 뿐만 아니라 비급여 의료행위의 표준화에 활용되는 등 의사의 진료권이 제한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시각이다.
더욱이 민간 자율성을 배제한 정부 주도의 규제 중심 지침으로 의사들의 의학적 자율성을 침해하고 의료의 규격화를 강요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
이선희 교수는 "전문가 간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지침들이 무분별 배포되거나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나 심사평가원을 중심으로 진료지침 개발에 정부 관련 조직이 참여하는 등 정책 난맥을 보이고 있어 자칫 임상전문가에 의한 자율적이고 과학적인 진료지침 개발과 활용이라는 정책목표가 훼손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전문가가 주체적이고 유연하게 진료지침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정부조직에 의한 관료적 방식의 개입보다는 전문학회들과 대한의학회가 중심이 돼 진료지침을 개발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정부는 재정적 후원자로 역할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며 "아울러 진료지침 개발과정에서 각 진료과목간 이해관계가 원만하게 조정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라고 말했다.
이에 선행돼야 하는 것이 의료계의 공감대다. 이 교수에 따르면 아직까지도 임상진료지침에 반대하는 의료계 내부의 목소리가 적지않다.
의료계가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전에 정부 주도의 임상진료지침 개발 사업이 추진된다는 점에서 임상진료지침에 대한 의료계의 반감은 더욱 심해질 것이란 점도 문제다.

의료계, 지침 개발 적극 참여해야
대한의학회 김성덕 회장은 최근 의학회 회보에 임상진료지침은 전문학회를 중심으로 학술적·공익적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국내서도 이미 많은 학회들과 임상의사들이 진료지침을 만들어 왔으며, 이 시점에서 의료계의 반대로 진료지침을 방임한다면 오히려 외국의 진료지침이 무분별하게 규제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의학회 내에서 임상진료지침 개발 사업을 수행하는 것이 학회 간 갈등 조정, 공조 대처, 역량 결집 및 활용을 위해 타당하다"고 밝혔다.
개인이나 특정 대학이나 학회가 아닌 공동작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의학회가 중심으로 의료계가 자율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하고 정부가 재정지원을 하는 파트너쉽 형태로 발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한의사협회(회장 경만호)는 NSCR 사업에 대응하기 위한 "임상진료지침 대책 마련 실무 TF"를 결성키로 하고 오는 9일 오후 6시 의협 동아홀에서 토론회를 열고 의료계의 의견을 수렴할 방침이다.
이날 토론회에는 근거창출임상연구국가사업단 추진배경과 현황(허대석 보건의료연구원장), 임상진료지침의 현안과제와 향후 추진방향(이선희 이화의대 교수) 등의 발제에 이어 배상철 한양의대 교수, 박병주 서울의대 교수, 이원표 내과개원의협의회 부회장, 조남현 의협 정책이사 등이 토론자로 나선다.
의료계의 개발의지와 무관하게 의료의 질이 주요 정책과제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문가 집단인 의료계가 지침개발을 부인하고 소극적으로 관망한다면 타율적인 방식으로 정책환경에 편입될 수 있다.
임상진료지침이 타당하게 개발되고 적극적으로 활용돼 국민과 의료계 모두에게 긍정적 효과를 견인해내려면 무엇보다 의료계의 능동적 자세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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