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중단 권리 가족에 없다" 법원 판결

"품위있는 죽음" 인식전환 필요…의료낭비도 고려해야

 최근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식물인간 상태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중인 환자의 가족들이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한 만큼 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한 "퇴원방해금지 신청"을 기각했다.

 법원은 판결에 앞서 말기환자가 입원중인 병원을 방문,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의료진의 의견을 들은 바 있어, "보라매병원 사건"을 경험한 의료계로서는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 치료에 대한 법원의 새로운 해석이 있을 지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그러나 판결은 환자와 가족들의 결정권보다는 헌법에 보장된 생명보존의 법칙이 우선시돼야 한다는 것으로 기존의 시각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현행법만을 따랐으며, "환자가 식물인간 상태로 있지만 의학기술의 진보가능성을 따져보면 회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단정하기 힘들다"고 전망하고 있다.

 특히 가족들의 경제·정신적 고통이나 환자가 의식이 있었을 때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다 할지라도 가족이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치료중단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원칙을 또한번 강조한 셈이다.

 그렇지만 의료계의 생각은 다르다. "존엄사"는 세계적으로 이미 정립된 사안인데 우리나라만 유독 "안락사"와 연계하여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며, 법원도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서울의대 혈액종양내과 허대석 교수는 "이 문제에 도화선이 된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이 일어난지 10년이 지났다. 임종과 관련해서는 복잡한 문제가 많고 제도적 정비도 필요하다. 법원도 현행법만을 따르는 것이 능수는 아니다. 이번 판결은 방어적 판결로밖에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우선 말기 암·에이즈 환자같이 연명기간이 매우 짧은 환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법을 먼저 제정한 후 점차 적용여부 확대 방안을 검토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고 제안했다.

 또한 회복 가능성이 없거나 매우 희박한 환자에 대한 연명가능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시급하다고 강조하고, 연명치료 중단을 안락사로 받아들여 과민반응을 보이는 한국 사회와 매스컴에 대해 극단적인 의료집착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사망자는 1년에 약 25만명. 이 가운데 말기암환자의 70%가량은 연명치료를 받다가 사망하고 있으며, 사망하기 1개월 전 의료비가 전체 의료비의 30%를 차지한다.

의료가 발달하면서 연명치료가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허 교수를 비롯 말기환자의 삶의 질 제고를 주장하는 의사들은 적절한 비유는 아닐지언정 "폐차시킬 자동차는 당연히 폐차한다.

인위적으로 엔진을 가동한다고 해서 자동차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도 안락사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연명치료 중단이 사회적으로 합의되면 3차 의료기관 병상이 없어 치료를 기다리고 있는 중환자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매년 암으로 사망하는 6만5000명의 환자 중 병원에서 임종을 맞는 환자가 10년전 10%에서 최근 50%를 넘어서고 있다.

 결국 환자와 보호자에게 경제·심리적 부담을 덜고 품위있는 임종을 하게 된다면 3차기관의 빠른 입원도 가능하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최근 한나라당 김충환 의원과 국립암센터가 주최한 호스피스 토론회에서 임종을 앞둔 불치병 환자의 품위 있는 죽음을 도와주는 호스피스완화의료는 선진국에서는 이미 널리 보급된 제도라고 소개한뒤 "인간에게는 태어날 수 있는 권리는 없지만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있다"며, 호스피스 법제화를 위한 정부와 의료계의 협조를 당부하기도 했다.
 보건복지가족부 이덕형 질병정책관은 "말기암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암 관리법 개정안에 호스피스 서비스에 대한 법적 근거 마련 등 관련 규정을 포함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별도의 호스피스 수가체계를 마련, 내년부터 1년간 시범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따라서 호스피스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면 연명치료 문제도 판결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그만큼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의료계는 인공호흡기 등에 의지한 채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아니면 편안하고 의미있는 임종을 맞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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