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자 10명 중 8명 일차진료 거부 당해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군포 전화방 도우미 성폭행, 혜진·예슬이의 죽음, 일산 초등학생 성폭행 미수, 대구 초등학생 집단 성폭행, 강간당한 어느 여고생의 화장실 출산과 영아 유기….
 하루가 멀다하고 섬뜩한 성폭행 사건이 터진다. 문제는 여론은 성폭행 사건의 선정성에만 집중하고 국가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엄중히 다루는데만 혈안이 돼 사건해결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폭행은 피해자에게 신체적인 상해뿐 아니라 정신적인 후유증, 또는 원치 않는 임신이나 성병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이는 모두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이며 정신적 문제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심각하게 진전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성폭행 피해자들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지속적인 의료적 지원이 필요하다.
 또 교육, 의료, 복지 등 각계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한 교육, 홍보를 통해 성폭행 발생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방안도 강구해야 한다.
 사회적 정체성이 정립되는 10대 초반 연령대에서 성폭력 피해가 증가하고 있는 점과 아동성폭력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경찰청 통계를 보면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성폭력 발생건수는 1만1587건에서 1만5325건으로 지난 6년간 약 28% 증가하며 지속적인 증가추세를 유지하고 있다.
 남자 피해자의 경우 13~15세가 2006년 63건으로 전년대비 17건에서 무려 4배나 증가했고, 여자의 경우도 같은 연령대에서 2006년 1135건이 발생, 전년대비 647건에서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하며 해당 연령대의 성폭력 발생 건수가 급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만 13세 미만을 대상으로 한 아동성폭력은 2002년 전체 성폭력의 5.2%를 차지했으며 2006년에는 6.4%로 증가하면서 아동성폭력은 극심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통영 수면내시경 의사 성폭행도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진 사건이었다.
 물론 이 사건으로 의사 집단 전체가 매도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성(性)과 관련된 의사들의 윤리의식이 의심받게 된 것은 사실이다.
 이와 관련 내부적인 반성과 함께 국민 건강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가진 의사들이 성폭행 피해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 회복을 돕는데 힘써야 한다.
 최근 성폭행 발생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 성폭행 피해자 의료지원시스템을 점검해보고 의료적 개입의 중요성과 실질적인 처치 방법에 대해 살펴본다.




법적분쟁 휘말릴까 걱정…의사가 법정서는 일 드물어
"쉬쉬"하던 과거와 달라…의료 적극 개입 필요성 대두


 지난 9일 국립경찰병원 내 위치한 여성·학교폭력 피해자 원스톱지원센터.
 오후 4시경 창백한 얼굴을 한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녀가 어머니와 함께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성폭력 피해로 방문하는 경우가 원스톱지원센터 전체 상담건수의 60~70%를 차지하고 있으며 자그만한 체구의 이 소녀도 방과 후 귀가길에 성폭행을 당해 이곳을 찾았다. 곧바로 한시간 여에 걸친 응급처치와 검사, 이어 피해자의 녹화 진술이 이어졌다. 응급피임약과 항생제를 처방받은 소녀는 성병 검사 등을 위한 재방문 일자와 주의사항을 설명듣고 다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센터 문을 나섰다.
 센터에 있는 동안에도 내내 옷깃을 여미며 겁먹은 모습을 보였던 이 소녀는 불안감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문을 나서는 뒷모습까지도 파르르하다.















경북 영동의료원의
여성·학교 폭력 피해자
원스톱지원센터.

피해자 3분의 2는 의료지원 못받아

 지난 2005년 12월 여성부와 경찰청 주도로 만든 여성·학교 폭력 피해자 원스톱지원센터는 서울(경찰병원), 경기(아주대병원, 의정부의료원), 경북(영동의료원) 등 전국 14개 지역의 병원 내에 배치돼 24시간 의료·법률·수사 문제 해결을 돕는 기관이다.

 작년에 전국 원스톱지원센터에서 도움을 받은 성폭력 피해자는 5701명. 이는 전년도 2868명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로 2007년에 경찰에 신고된 성폭력 피해사건이 1만5325건임을 감안하면 전체 피해자의 3분의 1 정도가 의료지원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더 많은 숫자인 3분의 2의 피해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이 시스템의 의료 지원에서 소외되고 있는 셈이다. 더군다나 성폭행 신고율이 낮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한국 형사정책연구원(2006)"에 의하면 성폭행 신고율은 실제 발생 건수의 6.1~6.7%로 추산되며 한국은 OECD 국가 중 3번째로 성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국가이다.

신고율을 기반으로 인구 10만명 당 성범죄 발생건수를 추정한 연구에 의하면 성범죄 발생률은 인구 10만명 당 13명으로 OECD 국가 중 12위이다(United Nations Office on Drugs and Crime, UNODC 2003). 그러나 일각에서는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해 신고안된 사건까지 계산하면 세계 1위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응급실 당직의 원활한 지원 어려워

 병원 내 위치한 성폭력 피해자 의료지원기관은 원스톱지원센터가 유일하다. 그러나 전담 의료인력이 없고 대부분 응급실 당직의들이 이 업무를 맡기 때문에 특히 응급환자들이 몰려드는 심야시간대에 원활한 의료서비스가 제공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한 응급실 당직의는 "응급실의 특성상 환자가 밀려들기 시작하면 정신없이 바빠지는데 이때 성폭력 피해자를 정서적으로 안심시키면서 서두르지 않고 처치와 검사를 하는 것은 인력이나 업무진행상 무리가 있다"고 토로했다.

성폭행 피해자가 극도로 예민하고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을 알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들 앞에서 성폭행 피해자들은 우선 순위상 밀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아동 성폭력 문제에 대한 차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대두되면서 2006년 6월 대형병원과 연계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해바라기아동센터도 문을 열었지만 서울, 영남권, 호남권 3곳에 불과하다.

 여성부는 "혜진·예슬양 사건", "대구 초등학생 집단 성폭행 사건" 이후 해바라기아동센터를 전국 16곳으로 확대하고 중앙센터를 세워 체계적인 관리가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이를 위해 필요한 예산으로 320억을 추산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예산 확보가 불투명한 상태로 여성부의 계획이 현실화 될 지는 미지수이다.

적절한 처치 방법 모르는 경우 대부분

 문제는 이처럼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기관이 태부족이라는 점과 의료인들조차 성폭행 피해자의 일차 진료를 기피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한국성폭력위기센터의 발표에 따르면 2003~2005년까지 성폭력 피해자와 가족을 상담한 결과 상담자의 80% 이상이 인근 산부인과를 찾았다가 진료를 거부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로 인해 필요한 증거확보의 기회를 놓친 경우도 전체 상담자의 50%에 육박했다. 또 센터를 통해 필요로 하는 도움으로는 진료기관 소개와 진단서 발부 및 증거확보 등 의료기관 지원이 22%를 차지했으며 정신과 치료가 27%를 차지했다. 도움이 필요한 부분의 절반 가량이 의료지원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증거채취 등을 통해 성폭행 피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는 상담자가 2004년부터 95%를 넘어섰다는 점으로 이제 성폭력 발생시 의료인이 적극 개입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성폭력 전담기관이 아닌 일반 의료기관에서 이들을 기피하는 이유는 향후 법적 분쟁에 휘말리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한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또 어떻게 진단서를 발급해야 하는지, 검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적절한 처치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경우도 많다.

 순천향대병원 산부인과 이임순 교수는 "모든 산부인과 전문의를 비롯해 일선 의료기관 의사들도 성폭행 응급키트 사용법을 비롯한 성폭력 환자의 처치지침을 숙지해 성폭력 피해자들을 거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 의대·의전원 시절부터 성폭행에 있어 의료적 처치가 중요함을 인식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의사국가고시에 성폭행 피해자 처치지침을 포함시키는 등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성폭행 피해자의 적절한 처치시 인센티브 제공 등 정책적인 개선을 통해 의사들이 사회적 문제인 성폭행에 대해 적극 개입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여성문제 전문인 민들레법률사무소에 따르면 성폭행 사건 재판시 피해자를 진단한 의사가 법정에 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 법률사무소의 경우 현재까지 진행한 성폭행 재판 중 단 한 건도 관련 의사를 증인으로 출두시킨 적이 없다.

법률사무소 한 변호사는 "형식을 갖춘 진단서만으로 충분한 증거가 되며 드물지만 보충이 필요한 부분은 서면이나 전화로도 가능하기 때문에 미리 불안감을 갖고 성폭행 사건에 대해 미흡한 대처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지원센터 활성화 위해 전문 인력 키워야"
법의학간호사 성폭행 전문간호사로 육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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