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화가 모네(Claude Monet, 1840~1926년)는 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소년시절은 노르망디의 은혜 받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랐다. 화가가 된 후 1874년에는 세잔느, 드가, 르누아르 등의 동료화가들과 함께 개최한 전시회에 `인상`, `해돋이`를 출품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을 인상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상파 화가들을 빛의 화파(畵派)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단순히 빛의 표정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그림자의 인상도 중요시 해 훌륭하게 화폭에 옮기는 것이었다.
 즉, 찬란한 빛과 짙은 그림자는 바로 인생 삶의 두 본질이라 생각했으며 변하는 자연과 더불어 빛과 그림자를 표현하는 것에 온갖 정열을 쏟았던 것이다.
 모네가 자신의 영원한 모델이자 아내인 카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nux, 1847~1879년)와 만난 것은 1865년 카미유가 18세이고 모네가 25세로 두 사람은 모델과 화가로 만났지만 곧 사랑에 빠져 동거하게 되었으며 1867년에는 아들 장을 임신하게 되었다.
 화가가 자화상 이외에 가장 쉽게 모델로 끌어들일 수 있는 타인은 가족이고, 가족 중에서도 아내가 우선이다. 아내는 모델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며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화가는 모델이 된 아내에게 표정이나 포즈를 자연스럽게 요구할 수 있다. 아내 역시 화가와 함께 생활하는 만큼 남편의 작품은 물론 그릴 때의 심리와 기분을 다른 모델보다 잘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에 아내를 모델로 한 그림중 걸작이 많다.
 모네가 카미유를 모델로 한 작품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인`(1875)이다. 언덕에 올라서서 화가를 내려다보는 카미유의 모습은 마치 선녀와 같다. 구름이 끼었지만 청명한 하늘의 빛을 가리기 위해 파라솔을 든 여인은 신선하고도 상쾌한 분위기를 전해준다. 거칠고 빠른 붓놀림은 하늘과 여인, 풀밭을 넘나들며 화면 전체를 휘감아 찰나와 순간의 미학을 이룬다.
 화면의 하방 3분의 1 정도는 풀밭이 점하고 노랑, 오렌지, 푸른, 초록 등의 빛깔은 마치 태양의 빛을 찢어 발려 놓은 듯하고 모델이 서있는 앞으로 펴진 그림자에는 짙은 검은 초록색이 겹치고 있어 그림자에서도 빛이 반사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이 그림 앞에 서면 맑은 대기에 내리쪼이는 햇빛을 마음껏 들여 마시는 것 같으며 초원에 부는 상쾌한 바람은 내 몸을 스쳐가는 듯 해 마치 모델 옆에 내가 서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 인상파 화가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정열의 전모를 보여주는 그림이라 하겠다.
 또 모네가 카미유를 모델로 그린 그림 중에서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눈물을 삼키며 보게 하는 그림도 있다. 그것은 `일본 여인(기모노를 입은 카미유)`(1876)이다. 당시 인상파 화가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던 자포니즘(japonisme)의 영향을 받은 것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카미유는 붉은 색의 기모노를 입고 춤 추는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초록색 벽을 장식한 부채가 매우 역동적인 느낌을 줘 고달픈 생활고나 가정적인 문제 등의 어려움은 철저하게 감춰진 그림이다.
 사실 이 작품이 그려질 무렵 카미유의 몸에는 병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림 속 그녀의 얼굴을 보면 다른 그림에 비해 누렇게 뜬듯하고 웃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상품광고에서 흔히 보는 모델들의 미소와 다를 바 없다. 아내에 대한 사랑스러움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즉, 그녀를 그려야 할 필연성이 전연 느껴지질 않는다.
 모네는 생활고에 허덕이다 보니 예술성보다 돈이 되는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카미유에게 화려한 일본 옷을 입히고 병들어 누렇게 뜬 얼굴이지만 억지웃음을 지우게 했던 것이며 카미유는 이를 저항 없이 따랐던 그들의 처절했던 상황과 관계가 스며있다.
 모네의 그림은 에르네스 오슈데라는 화상에 의해서 구입 수집되곤 하였는데, 그러다가 1870년대 후반에 불어 닥친 불경기는 에르네스 화상을 파산으로 몰고 갔다. 에르네스가 자살을 시도했다가 벨기에로 사라져버리자 전전하던 부인 알리스는 여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모네의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두 가정이 한 지붕 아래 살기위한 것은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서로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절약해 보고자하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남편이 없는 여인이 병든 아내와 사는 남자의 집에 동거한다는 것은 결코 고운 시선을 받을 수 없는 행위였다.
 실은 모네와 알리스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도 카미유는 웃으며 모델을 서야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 미소를 마음에서 우러나는 미소로 볼 수 있겠는가?
 둘째 아들 미셀을 임신하기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카미유는 1878년 아들을 낳은 뒤부터 계속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는데 실은 자궁암이 진행되고 있었다. 1년 뒤인 1879년 9월 4일 모네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서른둘의 나이로 영면했다.
 그래서 모네는 `임종을 맞은 카미유 모네`(1879)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고락을 함께해온 아내를 잃은 모네의 슬픔이 절절히 배어 있다. 안개 같은 검푸른 색 속에 감싸인 채 죽음의 순간을 맞는 카미유의 얼굴이 애처롭다.
 그가 젊은 날부터 탐구해왔던 빛의 분광, 그 현란한 색채의 아름다움마저 아내의 죽음 앞에선 숨을 멈추었나보다.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엷은 빛이 카미유의 얼굴 윤곽을 겨우 드러내게 하고 그 주위로 마치 그녀가 당하고있는 죽음의 고통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듯이 검푸른 색들이 요동치듯 거칠게 표현됐다.
 이 순간을 표현한 그가 남긴 글을 보면, "내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한 여인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제 죽음이 찾아 왔습니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시시각각 짙어지는 색채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추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제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려는 사람의 마지막 이미지를 보존하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발상이었습니다. 그 특징을 잡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전에 저의 깊숙한 본능은 색채의 충격에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죽음을 맞는 비통한 순간에도 모네는 직업적으로 죽음 주위에 머물며 순간순간 변해가는 색채를 보았다.
 아내의 죽음을 보는 순간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되겠고, 또 사랑하는 사람을 곧 잃게 된다는 자신의 내면세계의 처절함을, 자신의 심리적 변화까지를 화가는 본능적으로 추적하며 아내에 대한 서러움을 레퀴엠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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