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학교육학회 공동기획
의학교육 패러다임



신 좌 섭

서울의대 교수
의학교육학과


학생·교수·의대 형평의 건강 회복해야

"3개의 과학" 제대로 작동 않는게 현실


 정초부터 실없는 질문이나 해댄다고 화를 내는 분도 있겠다. 멀쩡히 눈앞에서 잘 돌아가는 조직을 갖고 공연히 시비는, 그러나 삼척동자도 인생을 재설계하는 정초이니만큼 잠시 숨 돌리고 생각해보자.

 의학교육의 대가로 불리는 미국 남가주 대학의 에이브람슨(Stephen Abrahamson) 교수는 기본의학교육의 프로세스를 학생과 교수, 그리고 의과대학(이하 의학전문대학원 포함)이라는 3자의 틀로 바라보고 있다.

 이 3자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살펴보면 기본의학교육의 프로세스를 점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 "제대로"인가는 학생에게 "학습의 과학"이 교수에게 "교수의 과학(science of teaching)"이 의과대학에 "시스템의 과학"이 잘 작동하고 있는지에 의해 판단할 수 있다. 여기서 "학습의 과학"은 1 학생은 저마다 적합한 학습유형을 가지고 있는 개성체로 대해야 하며, 2 학습에는 동기가 중요하고, 3 학습이란 학습자 개개인의 삶에 의미 있는 경험이어야 하며, 4 학습에는 피드백이 매우 중요하다는 4가지 원칙으로 요약된다.

 또 "교수의 과학"은 교사는 1 가르치는 주제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갖추어야 하고, 2 가르침의 대상인 학생에 대해 완벽한 지식을 갖추어야 하며, 3 학습목표와 교육방법을 일치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3가지 원칙으로 요약된다.

 세 번째 "시스템의 과학"은 1 대학은 사명(mission: 존재 이유)에 의해 좌우되고, 2 의과대학이 수행하는 교육, 연구, 봉사(진료 포함)의 기능들은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영향을 미치며(동일한 자원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며), 3 학습의 과학과 교수의 과학은 의과대학의 운영제도 및 시스템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3가지 원칙으로 요약된다.

 지면관계상 3가지 모두를 상세히 살펴볼 수는 없지만 위 3개의 과학이 우리나라 의과대학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직관으로도 알 수 있다.

천편일률적 강의 "학습의 과학" 무색

 극소수의 대학을 제외하고 전교생에게 천편일률적인 대형 강의를 실시하고 있는 현 상황이 "학습의 과학"의 첫 번째 원칙을 충족하는가?

 교수가 학생을 일대일로 대면하는 일이 연중행사인 현 상황이 개개인에 대한 피드백을 중시하는 네 번째 원칙을 충족하는가? "교수의 과학"을 보자면, 주제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야 충족시키고 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되지만 우리 교수들이 학생 혹은 학습자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시스템의 과학"을 보자면 오늘날 의과대학은 교육을 자신의 우선적인 사명으로 설정하고 있는가?

 의과대학의 업무 중 교육에 할애되는 자원의 비율은 얼마나 되는가? 의과대학의 운영제도와 시스템은 학습의 과학과 교수의 과학을 떠받쳐 지원해주고 있는가?

학습자적 지식부족 "교수의 과학" 불충족

 어느 정도 경험과 상식이 있다면, 지금 우리나라 대부분의 의과대학에서 "학습, 교수, 시스템" 3개의 과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데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나라 의과대학의 기본의학교육 프로세스는 아직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3개의 과학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스템의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에이브람슨의 논리를 빌지 않더라도 학습과 교육이 대학 운영제도와 시스템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과학을 살펴보자.

 의과대학의 사명(mission)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교육-연구-봉사(진료 포함)를 거론한다.

 그리고 지난 11월초 워싱턴에서 개최된 미국의과대학협회(AAMC)의 2007년도 연례회의(annual meeting)의 주제 "Health in the Balance"가 웅변하듯이 교육-연구-봉사(진료 포함)라는 3개의 미션은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

 인체의 건강이 생리적 평형(homeostasis)에 의해 유지되듯이 의과대학의 건강성은 3개 사명의 균형에 의해 유지된다. 그것이 깨지면 조직 차원의 프로페셔널리즘이 깨지는 것이고 그 결과는 국민과 사회의 외면이다.

 전통적으로 의과대학의 역할을 지칭하는 데 쓰여 온 "등받이 없는 세발의자(three-legged stool)"의 비유에서도 화두는 "균형"이다.

 세발의자는 네발 달린 의자에 비해 불안정하지만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그런대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stool"에는 등받이도 없으므로(영한사전에 보면 chair에는 등받이가 있다) 졸거나, 쓸데없는 동작을 하면 곧바로 넘어지기 마련이다.

 이 세발의자의 세 다리는 교육, 연구, 봉사를 상징한다. 그러고 보면 "등받이 없는 세발의자"의 비유는 의과대학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교육, 연구, 봉사(진료)의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넘어져 "코가 깨진다"는 상당히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비유이다.

 그런데, 이 3개의 미션을 수행하는 존재는 교수들이지만, 지금 우리나라 의과대학들은 소속 교수들의 업무의 총량을 관리하는 체제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는 대학이 교수들의 학문적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교수들이 수행하는 업무의 총집합으로서의 대학이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교육·연구·봉사 "시스템 과학" 부재

 대학이 교수들의 업무총량을 관리하지 못하는 상황의 직간접적 결과는 교육의 일방적인 희생이다. 대부분의 교수들이 학문적 출세나 추가 펀딩의 인센티브를 보장하는 연구와 금전적 인센티브를 보장하는 진료에 매진하는 반면 교육은 대부분 외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과대학 교수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이다. 시스템이 인센티브로 교수들의 성과를 관리하면서 교수들이 돌부처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대학이 교수들과 정례적인 업무협약을 체결하되 "대학 차원에서 업무총량의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조정하며 협약대로 일이 이루어지는지 실제 업무수행을 모니터하는 것이다.

 다소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되겠지만, 대학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여러 의과대학에서 도입을 고려하고 있는 교수트랙제도(faculty track system: 연구중심 교수, 진료중심 교수, 교육중심 교수 등의 교수역할 다변화)는 교수업무의 특성화와 더불어 대학의 업무총량관리를 위한 업무협약과 조정, 모니터, 그리고 이에 따른 평가보상을 목적으로 한다.

대학·병원 조직 경계 희미

 의과대학의 사명과 관련하여 또 다른 중요한 이슈는 병원과의 관계이다. 대학의 정체성을 논의하는 자리에 으레 등장하는 "○○병원 부속의학교"라는 자조적인 목소리에는 병원과의 관계에서 의과대학의 정체성 혼동에 대한 비탄이 담겨 있다.

 필자는 몇몇 의과대학의 전략기획을 자문하는 과정에서 의과대학 보직자들 조차도 대학과 병원 조직의 경계선을 혼동하는 경우를 자주 관찰할 수 있었다. 이 혼동은 대학이 추구해야할 3개의 사명 간의 균형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미친다.

 의료원 체계이든 독립법인 체계이든 의과대학과 병원은 명백히 서로 다른 조직이다. 교수 인력이 중첩되어 있다고 하지만 양자는 서로 독립된 조직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며, 양자 간 관계는 일종의 산학복합체로 재설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산학복합체의 주도권은 일부러라도 대학에 부여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다 큰 재력을 가진 병원이 주도권을 갖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이 문제만큼은 병원 스스로가 나서서 주도권을 대학에 부여해야 한다.

 정부와 국민이 우리의 병원은 별로 신뢰하지 않아도 의과대학은 아직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양자 간의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료계 집단차원의 프로페셔널리즘에 관련된 문제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인체의 건강이 생리적 평형(Homeostasis)에 의해 유지되듯이 의료계의 건강성은 의과대학과 병원의 역할균형에 의해 유지된다.

 참으로 갈길이 멀기는 하지만, 새해에는 우리나라의 많은 의과대학들이 진정한 "평형의 건강성"을 회복하기위한 대장정을 개시하기를 기대해본다. 이를 통해서만 기본의학교육의 프로세스가 제대로 작동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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