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창녀예요, 어쩔건데요?" 그림 속 여인에 관객들 돌팔매


"풀밭위의 점심식사"(1863) 파리, 오르세 미술관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나체는 당시만 해도 허용되었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로 여겨지는 나체는 허용되지 않던 시대였다.

즉 님프나 비너스 또는 오달리스크와 같은 신화적, 이국적 세계의 나부(裸婦)가 아닌 현실세계의 나부를 그렸다는 것이 비난의 원인이 되었다.

 즉 "풀밭위의 점심식사"를 보는 관객들은 어떻게 성장을 한 신사들이 밝은 대낮에 야외에서 벌거숭이가 된 여인들과 놀아날 수가 있는가 하여 분노하였던 것이다.

 또 그림에서 창녀로 보이는 벌거숭이가 되고서도 조금도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없이 오히려 정정당당하다는 듯이 관람자를 노려보는 것에 관중의 분노를 샀다.

노려본다는 것은 목적물을 주목해 보는 것으로 이는 자기의 행동이 다른 이에게 굴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에 분노한 관중이 작품 앞에서 지팡이와 우산을 휘두른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보는 이를 화폭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린 방법 역시 색조의 조정에 의해 명암효과를 추구하는 전통방식을 버리고 면면이 강조되고 단일 색채로 크게 처리하여 평면적으로 보이는 방법을 선보였다.

 얼핏 보기에는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과되지 않은 대낮의 광선과 세부 묘사를 단순화하여 빛나는 색채의 효과를 포착하는 방법을 쓰기 위함이었다.

작품 속 나체 여인 "발칙한 눈길"
살롱 관객들에 돌세례·격분 사



"올랭피아"(1863) 파리, 오르세 미술관


 인상파의 대가였던 마네는 이 그림에서 고전적 양식을 비교적 충실히 따르고 있다. 녹음이 우거진 풀밭 위에 나체의 여인과 반라의 여인, 정장 차림의 남자 2명을 배치시키고 있다.

이 그림에서 인물의 자세는 1520년경에 이탈리아의 동판화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제작한 동판화와 거의 흡사한 것으로 보아 실경을 묘사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여성을 발가벗기고 정장한 남성들이 여체를 노리개로 보는 남성우월사상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이라고 하여 페미니즘의 공격대상이 되고 있다.

또 그의 작품 "올랭피아"(1863)라는 그림도 1865년도 살롱 전에 출품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이 그림은 전 나체의 여인이 그것도 전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그림이다.

 전술한바와 같이 이때까지만 해도 나체 그림은 신화에 나오는 비너스 또는 육체미가 아름다운 모델이 주인공이었는데 역시 고전주의적 주제에서 누드를 차용하고 있는데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에서 고야의 "누드의 마야"(1800)에 이르기까지 반복되고 있는 작품이 지닌 몽상적 분위기는 배제되고 현대성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마네는 "스스로의 시대의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으며, 1850년대 이후 친교를 맺은 시인 보들레르의 "현대생활의 영웅성"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비난을 받은 이유는 누드의 여체로서의 관능성, 신비로운 신화적 일면을 배제하고 창녀임을 알 수 있는 도상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자신이 있으며 저돌적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여인의 발칙성에 있었다.

 올랭피아는 신선미나 인간미도 없이 고릴라처럼 국부를 손으로 가리고 있으며 여자의 얼굴은 겉늙고, 손은 더러우며, 주름 잡힌 발에는 낡아빠진 슬리퍼를 걸치고 있고 침대보나 시트는 고양이가 묻힌 석탄재 자국으로 더럽다.

이렇게 누추한 꼴을 하고 있는 창녀의 눈길을 보면 거만하게 관객을 쏘아보고 있어 마치 "그래 나는 창녀다. 그게 도대체 뭐가 어쨌단 말인가?"라고 반문하고 있는 듯한 눈길을 주고 있어 관객은 물론이고 지나던 사람들마저 돌을 집어 그녀의 얼굴에 던졌다고 한다.

 만일 이러한 눈길이 아니고 다른 나체 주인공들처럼 알몸이 된 것이 부끄럽다는 듯이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있었다면 관객들의 격분은 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간색조 없이 단순화된 색채 사용
어둡고 밝은 대조로 대위법적 배치


 사실 서양미술사상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마네의 "올랭피아"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마네 식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목걸이와 슬리퍼만 신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은 창녀이다.

당시 누드는 인기 있는 그림 소재 중의 하나였으나, 대부분의 누드화는 신화 속 여신의 모습으로만 등장했다.

 그런데 올랭피아는 쭉 뻗은 다리 사이 음부를 손으로 가리고 있고 흑인 하녀와 대조를 이루면서 요염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남성에게 사랑받기 원하는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작품 오른쪽 구석에 있는 검은 고양이는 발기된 남성을 상징한다. 이 고양이는 살롱전에 출품하기 직전에 덧그려졌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재현양식은 중간색조는 사용하지 않은 단순화된 색채가 어둡고 밝게 대조되어 단조로운 색채들을 대위법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마네의 의의는 근대회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새로운 양식의 화가로서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의 주제를 채택하여 새로운 회화 언어를 추구하는 것은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느냐의 문제에 달려있게 되는 것이다.

당시 이 그림을 보기 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주먹을 휘두르고 지팡이로 후려치는 소동이 벌어져, 그림 앞에 세 명의 경비원을 세워 두어야만 했다고 한다. 마네는 "올랭피아"에 대한 비난에 맞서 자신의 동거녀이자 "올랭피아"의 모델인 빅토린을 자신의 작품에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시켰다.

1860년대 젊은 화가·평론가들 주목
"예술 지도자적 존재"로 평가 받아


 1860년대 후반 E. 졸라를 비롯해 마네를 옹호하는 비평가가 나타났고, 나중에 인상파를 형성하는 젊은 화가와 평론가들이 모여들자 그는 새로운 예술의 지도자적 존재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870년대에는 밝은 색채로 필촉분할(筆觸分割) 수법을 써서 인상파에 영향을 미쳤으나 인상파전에는 한 번도 참가하지 않고, 살롱에 계속해서 출품하였다.

말년에 다리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정물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으며, 파스텔을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최후의 대작 "폴리 베르제르 바"(1882)로 "현대생활의 영웅성"을 멋지게 표현하였다.

마네의 그림에 종종 나타나는 쌀쌀함과 차가움이 주제에 대한 무관심이나 의미 작용의 말살과 같이 보이는 것은 조형성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라고도 풀이되며 조형 요소의 자립성을 강조한 순수회화의 탄생을 마네에게서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마네가 수난을 당했다는 사실이 현재로선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 마네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마네가 활동하던 무렵 살롱은 2년에 한 번 열렸고 살롱이 절대 권위를 지녔던 마지막 시기였다.

 이 권위로부터 부정당하고 농락당한 마네의 고독한 싸움에서 인상파가 태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뒷날 그를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렀다. 그러나 그는 인상파와 같은 부류로 불리는 것을 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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