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빛을 좇다


오랜세월 오직 시각에 충실한 인상주의
연작 "수련" 백내장 진행과정 엿보여


 모네는 자연의 변화에 민감했고, 자연이야말로 빛과 색채의 변화를 표현하는 최상의 소재라고 생각했다. 86년이란 긴 생애 동안 모네는 오직 자연의 빛만을 찾아 헤맸다.

수시로 변하는 일순간 빛들을 담기 위해 끊임없이 화폭을 메워 갔다. 그래서 모네에겐 어떤 주제를 그릴 것인가보다 빛의 변화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훨씬 더 중요한 과제였다.

1880년대에 그는 노르망디나 지중해 연안, 중부 프랑스, 브르타뉴의 벨릴 섬 등의 지방을 자주 여행하며 극적인 구도를 즐겨 그렸다.

 1890년대에는 여행을 그만 두고, 같은 모티브를 다루면서 시간의 추이에 따라 방법을 달리하며 그리는 연작에 착수, "짚더미"(1890∼9l), "포플러"(1891), "루앙대성당"(1852∼94) 등의 시리즈를 냈다. 1893년에는 지베르니에 수련(睡蓮)의 연못을 조성하였으며 1895년 무렵부터 "수련"의 연작을 시작했다.

 모네는 인상파 거장답게 가장 오랜 세월에 걸쳐 오직 시각에 충실해야 한다는 인상주의 원칙을 솔직하게 지킨 화가이다. 따라서 모네의 작품은 인상주의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놀라울 정도의 정확한 눈과 손놀림을 갖고 있었다. 집념어린 관찰을 통해 그는 촌음을 다투는 자연의 변화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른 것이었다.

 모네가 사랑하던 부인 카미유가 둘째 아들을 낳고 몇 달 후 폐결핵으로 사망했을 때 그는 그녀가 임종을 맞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죽는 인간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긴 놀라운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모네는 순간적인 이미지를 포착하여 자연의 변화를 재현하기 위해 그에 어울리는 붓 터치를 터득해 나갔다.

하지만 이같은 작업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같은 사물을 대하면서도 빛에 의해 변화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그가 보았던 순간의 빛, 그리고 그 빛에 의해 반사되는 사물의 형태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의 눈과 손은 항상 자연을 향해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따라서 그의 붓놀림은 필연적으로 빨라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미술평론가들의 해석이다.

그러나 모네의 신체적 정신적 변화와 작품을 결부시켜 의학적으로 해석한다면 젊은 시절부터 "눈에 안개가 끼는 것 같다"는 증상을 자주 호소했다.

이런 증상은 60세를 넘어서면서부터, 즉 그가 "수련" 연작을 시작할 무렵부터 더욱 심해져 다른 이가 보기에도 그의 눈에는 혼탁된 것이 보일 정도였다. 진찰한 결과 "백내장"이라는 진단과 더불어 수술할 것을 권유 받았다. 그러나 그는 수술은 단호히 거절했다.

 이러한 가운데 1911년에는 후처였던 아리스 마저 잃게 되자 실의에 찬 나머지 증상은 점점 더 심해져 빛깔에도 혼동이 일기 시작했다. 친구 Thibault- Sisson에 보낸 편지에서 "붉은 색은 다갈색으로 보이고 핑크색은 혼탁된 등불 빛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시력이 악화되기 전에 그린 "수련 연못"(1889)에서 보는 그의 정원 지베르니의 일본식 징검다리는 뚜렷하며 나무나 연못 수련들도 그 형태와 빛깔이 뚜렷하게 자기 고유의 빛깔대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시력이 악화되어 형태를 분간할 수 없고 빛깔에 혼동이 일어났을 때의 작품, 그것도 먼저 그림과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그린 "연못의 일본식 징검다리"(1923)라는 작품을 보면 우선 한마디로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단지 일본식 징검다리의 아치만이 두 줄기 활모양으로 휜 두터운 불규칙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빛깔은 완전히 변색되었다.

회갈색이던 일본식 징검다리는 흑갈색으로 변했다. 연못의 물은 황색으로, 나무나 숲의 녹색은 황색 또는 적갈색으로 표현됐다. 즉 완전히 실명된 상태이며 그런 시력으로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것은 그때까지의 업적에 누가 되는 것으로 밖에 생각 할 수 없게 됐다.

 그 무렵 안과의사 크텔라(Charles Coutela)는 시력이 왼쪽 눈의 10분의 1로 저하되어 있는 오른쪽 눈이지만 수술을 하면 회복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모네는 수술을 거부하고 약물요법을 고집했다.

크텔라 의사의 기록을 보면 모네에게 산동(散瞳)약을 투여했다고 나온다. 그것은 "중심성 백내장"의 경우 혼탁된 부분이 시축(視軸)의 중심을 벗어나면 일시적으로 시력이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요법도 거듭 시행하면 효과가 없어지기 마련이다.

의사의 수술 권유를 모네는 다시 거부, "이나마 빛은 볼 수 있는데 수술로 이것마저 잃을 것 같아 수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친구 원로정치가(1차 대전 당시 수상을 지낸) 죠르쥬 끌레망(Georges Clemenceau 1841∼1929)이 모네에게 간곡히 수술을 권하여 결국 수술을 받게 되었다.

1922년 12월 크텔라 의사의 집도로 우측 눈 수정체의 혼탁된 부분의 전반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결과는 실망적. 결국 혼탁되지 않아 남겨놓았던 후반부가 이번에는 혼탁되기 시작하여 할 수 없이 재수술을 받게 되었다. 재수술 결과 시력은 어느 정도 회복됐으나 도수 높은 안경을 써야만 했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수술 받은 눈은 시야의 빛깔 흡수차로 푸른 청색으로 보이고, 수술 받지 않은 좌측 눈은 백내장때문에 다갈색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가 동일한 장소에서 수술 받은 눈과 수술 받지 않은 눈을 사용해 각각 그린 그림이 있다. "장미정원에서 본 집"(1923)이 있는데, 한 장은 수술 받지 않은 눈으로 그린 것으로 시야에 모든 것은 붉게 보이며 하늘은 황색으로 보여 황갈색이 짙은 희미한 선으로 된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수술 받은 눈에 비친 광경을 그린 것으로 청시증(cyanopsia) 때문에 붉은 색과 황색은 보이지 않고 청색조가 짙으며 사물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의 연작 "수련"은 1899~1926년 작고할 때까지 추구하던 최후의 작품 주제이다. 모네가 그토록 오랜 기간 수련에 집착했던 것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는 빛과 색채를 그대로 그리고 싶었고, 그것을 위해 오랜 시간 수련을 관찰하며 연작을 그렸던 것이다.

 "수련"을 통해 우리는 모네가 갖고 있던 몇 가지 회화기법을 엿볼 수 있음과 동시에 그의 병적을 알 수 있다.

 모네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붓놀림이 매우 빨랐고 붓질을 시작한 첫 장소에서 무조건 그림을 완성해야 했다. 일단 시작한 그림을 마무리하기 위해 그에겐 내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남다른 화법을 구사하게 된 것은 그가 갖고 있던 "백내장" 때문이며 결국 백내장이 인상파 거장의 화법을 탄생 시킨 셈이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수련 연못"(1889) 런던, 국립 미술관
"연못의 일본식 징검다리"(1923) 파리, 마르모탄 미술관
"장미정원에서 본 집"(1923)(수술 안한 눈으로 그림) 파리, 마르모탄 미술관
"장미정원에서 본 집"(1923)(수술한 쪽 눈으로 그림) 파리, 마르모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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