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으로 일관된 작품
공포에 떠는 인간내면 표출
끊임없는 정신분열에 시달려



"절규"(1893) 오슬로, 국립 미술관

 뭉크는 오슬로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1881∼1884), 급진적 예술인그룹의 영향을 받아 삶과 죽음에 대한 주제로 그의 작품은 일관하게 되었다.

자신의 인생을 바탕으로 자신이 느끼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구체화하여 상징적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출하고자 했다. 특히 생애 전체를 통해 볼 때 뭉크는 훌륭한 초상화가였으며, 항시 즐겨 다루는 그 자신으로서 일생의 대 시리즈가 되는 자화상을 남기고 있다.

 자화상 중에서 거친 필세에 의한 자신의 얼굴을 표현한 그림으로는 "담배피우는 자화상"(1895)과 심리적인 자화상인 "절규"(1893) 그리고 "고뇌하는 자화상"(1926) 등은 그의 병적을 잘 나타내며 또 병 때문에 탄생된 소위 심리적 자화상인 "절규"는 세계적인 명화가 되었다. 인간의 고뇌나 공포의 상징으로 그의 그림은 괴물과 같은 절규하는 얼굴이 사용되고 있다.

 그가 담배피우는 자화상을 그리고 나서 남긴 글 가운데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종의 병이요, 도취이다.

그 병은 벗어나고 싶지 않은 병이요, 그 도취는 내게 필요한 도취이다"라고 하였다.

즉 그는 정신질환을 앓으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병과의 투쟁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작품 중에는 인간의 고뇌나 공포에 찬 모습을 표현한 것이 많은데, "절규"라는 그림은 다리 난간에 홀로 서서 양쪽 귀에 손을 대고 몸을 휘면서 괴로워 소리지르는 마치 해골같은 인간은 필사적으로 무엇인가 공포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듯하다.

 그림의 주인공인 본인을 마치 지옥의 유황불에서 막 건져 올린 듯 흐물흐물하고, 그 눈동자는 총기를 잃고 퀭하다.

마치 그림 속에서 금방이라도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캔버스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이다. 뭉크의 이미지들은 화면에서 현실공간에서 부유하며 떠다니는 무척추동물을 연상케 한다.

이 그림은 화가자신의 체험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그의 일기(1892)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두 친구와 같이 길을 거닐고 있었다. 해가 저물었다. 나는 공포감을 느꼈다. 갑자기 하늘이 붉은 핏빛으로 변했다.

나는 우뚝 서 버렸다. 죽을 것같이 피곤해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검푸른 도시의 협만에 걸린 타오르는 핏빛 구름을 보았다. 친구는 계속 걸어가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공포에 떨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 무렵 뭉크가 자신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작품의 맨 위에 가늘게 써놓은 문구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거기에는 "광인에 의해서만 그려질 수 있는 작품"이라고 적혀있다.

 즉 미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이 문구를 정말 뭉크가 적어놓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뭉크의 정신장애가 이 그림을 탄생시킨 것만은 확실하다.

즉 그가 1905년에 쓴 글에서는 "몇 년 동안 나는 거의 미쳐 있었다. 그때 광인이 무시무시하게 뒤틀린 얼굴을 내밀었다. 여러분도 나의 그림 "절규"를 알고 있겠지만, 당시 나는 극단적 상황에 몰려 있었으며 내 피속에까지 자연의 절규가 스며들어 터질 것만 같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렇듯 그의 정신이상이 "절규"라는 명화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는 이 그림과 더불어 남긴 글에서 "나는 숨쉬고, 느끼고, 사랑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라고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았는데 이것은 자기가 정신적인 고독과 공포를 느껴 불안하고 절망적인 현대사회에 대한 절규이며 경고라고 해석된다.

즉 인간은 결코 고독, 공포,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죽음에서 삶을 보듯, 고독과 공포, 불안과 절망을 통해 현실을 보아 터져나는 절규야말로 오늘날 문명사회라고는 하지만 파괴되는 자연과 문화생활이라는 명목하에 살벌해져가는 현대사회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외침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후에도 뭉크는 끊임없는 정신분열증의 발작과 불안에 시달리던 나머지 코펜하겐의 야콥슨박사의 정신과 병원에 입원하여 3개월 남짓 치료를 받았는데 주로 전기충격요법을 받았다.

전기충격요법이란 전기로 충격을 주면 환자는 마치 간질환자가 발작할 때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떨듯 심한 충격을 가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죄의식을 몰아낸다는 가설로 이루어지는 보기에도 끔찍스런 환자에게는 상당한 고통을 주는 치료법이었다.

 입원한 그는 치료 뿐만이 아니라 알코올 중독에 대한 치료도 받았다. 그는 입원 중에 야콥슨 박사에게 감사의 뜻으로 그의 초상화 "야콥슨 박사의 초상"(1908)을 그렸는데 그림 속 야콥슨 박사는 상당히 거구인 것으로 표현되었다.

물론 북구사람이기에 거구일 수도 있지만 아마 전기충격을 가하는 야콥슨 박사가 아주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서 커 보였기 때문인 것 같으며, 정장을 하고 서있는 전신의 초상화를 그린 것은 그가 자기 주치의를 우러러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야콥슨 박사는 체격도 당당할 뿐만 아니라 그가 취하고 있는 태도 역시 위풍당당하다.

양 손을 허리에 올리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바라보는 눈초리는 매우 엄하면서도 인자한 듯 하여 환자를 안심시키는 듯이 보인다.

 뭉크는 정신이상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작품 활동은 계속했다. 그러다가 1920년대 중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시력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특히 좌측 눈은 거의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러한 자기의 시력장애에 고민하며 그린 것이 "고뇌하는 자화상"(1926)이다. 화가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눈을 밑으로 깔고 옷을 입고 있다.

 1930년 봄에는 우측 눈의 안구내출혈(眼球內出血)이 야기되어 병원을 찾게 되었다. 당시 그의 주치의는 오슬러 시민병원의 안과과장 Johan Raeder(1889~1956)박사였으며 그의 기록은 아직 남아 있다.

그는 뭉크가 눈의 혹사와 과로로 인한 것으로 보고 일절의 창작활동, 집필, 독서 등을 금지시켰으며 육체·정신적 안정을 취하게 하였던 바 그 후에는 비문증(myodesopsia)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비문증이란 "날파리증"이라고도 하며 환자들은 "눈에서 하루살이가 날아다닌다" "까만 점이 둥둥 떠다닌다" 등을 호소하게 되는데 이것은 눈 속에 있는 초자체에 여러가지 원인으로 혼탁이 생기거나 이물질이 나타나는 경우 망막에 그림자가 비쳐 눈앞에 무엇인가가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렇게 눈앞에 모기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비문증(飛蚊症)이라고 한다.

 뭉크가 살던 19세기 말은 많은 젊은이들이 죽음의 본질에 관한 문제로 고민했던 시대이다. 즉 생명의 신비, 예고없이 닥치는 죽음, 사랑의 배반의 괴로움 등은 그 시대를 살았던 예민한 젊은이들이 갖고 있던 공통된 고민이었다고 한다.


"고뇌하는 자화상"(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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