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다국적제약 "승인 절차 홀딩"···업계 "신약 가치 반영 제도 필요"
다국적제약업계, ICER 벨류·건보재정 비중 확대 등 제시
[메디칼업저버 문윤희 기자]미국의 ‘최혜국대우(Most Favored Nation policy, 이하 MFN)’ 정책이 국내 신약 출시를 준비하는 다국적제약기업 전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에서 다수의 신약을 출시 중인 다국적제약사들이 본사 차원에서 한국 신약 승인 절차를 ‘홀딩(보류)’하거나 심사(암질심, 약평위)에서 배제하는 등 이른바 ‘코리아 패싱(Korea - passing)’이 본격화되는 양상이다.
정부에서 이런 분위기를 감지해 이중약가제 등 혁신 신약의 가치를 인정하는 관련 정책을 내놓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다국적제약업계는 ”임시방편적 제도일 뿐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다“는 견해가 주를 이루고 있다. 본사를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인 대안이라는 의견이다.
반면 국내 제약업계는 해외 진출에 나서는 신약에 대한 적절한 제도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다만 현재의 약가인하 구조 속에서는 정부가 목표로 하는 ‘한국 제약산업 육성’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약가와 보험재정 건전성을 살릴 수 있는 현실적인 정책이 나와야 한다는 분위기다.
29일 복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상당수의 다국적제약기업 본사가 ‘MFN 정책’에 대한 영향을 고려해 한국 지사에 의약품 등재 절차를 중지시키거나 출시 계획을 철회하는 등 직접적인 지시를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
한 업계 관계자는 “MFN 정책은 미국 내 약가를 세계 최저 수준으로 맞추겠다는 취지로, 한국처럼 약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의 가격이 미국 약가의 기준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면서 “한국에서 낮은 가격으로 약가가 책정되면, 본사 입장에서는 미국 시장의 약가 하락 압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어 실제 신약의 승인을 보류 중인 상태”라고 전했다.
다른 관계자도 “본사 차원에서 MFN 리스크를 매우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다”며 “한국에서 약가가 낮게 책정되는 경우 글로벌 승인 절차상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어 신약 도입을 잠정 보류한 상태”라고 밝혔다.
이 같은 분위기를 우려해 정부는 대책으로 ‘이중약가제’ 확대를 검토 중이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최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MFN으로 인한 신약 철수 위험을 인식하고 있다”며 “이중약가제도를 통해 신약 등재를 신속히 추진하고 약가 공개 제도도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이중약가제는 건강보험 약가와 실제 거래가를 분리해 운영하는 제도로, 일부 국가는 이런 체계를 통해 해외 약가참조(ERP)나 MFN의 영향을 완화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 등이 유사 제도를 운영 중에 있다.
"약가인하 중심 정책구조로 '산업 육성' 어불성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중약가제는 근본적 해법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중약가제가 임시방편의 제도로 활용될 수는 있지만 장기적인 측면에서 신약의 한국 진출을 유도하는데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적인 신약 평가의 제도 개선 없이는 '한국 패싱'의 근본적인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목소리기 나오는 이유다.
관련 업계 관계자는 "이중약가제는 환영할 만한 움직임이지만, 결국 단기적 해결책일 뿐 정답은 아니다”며 “한국이 OECD 대비 낮은 약가 수준을 지속하면 신약 투자 비중이 줄고, 결국 신약 접근성 저하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실제 거래가격이 본사 (신약 출시)승인에 결정적이기 때문에, ‘표시가만 높이고 실제가는 낮게 유지하는’ 방식은 실효성이 없다"면서 "이중약가제도가 일부 회사들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신약을 출시하는 회사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때문에 다국적 제약업계는 정부 차원의 혁신 신약 가치 평가 체계를 새롭게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이중약가제 도입이 단기적 숨통을 틔워줄 수는 있지만, 혁신신약 가치 인정과 실제 가격 체계 개선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문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면서 "혁신신약의 가치평가를 강화하고, 실제 약가 중심의 제도 개편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관계자는 "본사 승인을 위한 중요한 요소로 고려하는 것은 ‘실제 거래가격(net price)’과 ‘신약의 임상적·사회적 가치’"라면서 "한국에서는 아직 신약의 가치를 국가가 제도적으로 인식하고 보상하는 체계가 충분히 정립돼 있지 않아 표시가와 실제가를 분리하는 제도만으로 제약사의 전략 변경을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처럼 다국적제약업계는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해결 방안으로 ▲신약 가치 평가 제도 개편(ICER 가치 인정) ▲신약 등재 기간 단축 ▲건보재정 내 신약 비중 확대 등을 제시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MFN이라는 리스크에 정부가 이중약가제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중복된 약가인하 구조와 혁신 신약의 가치 인정 제도를 마련하지 않고서는 ‘코리안 패싱’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정책을 우선적으로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은 이중약가제가 국산 신약의 글로벌 시장 진출에 좋은 기회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중복된 약가인하 체계를 수정하지 않고서는 산업 발전이 지속되긴 힘들다는 의견을 밝혔다.
노 회장은 "국산 혁신신약의 글로벌 시장 진입을 위해서는 이중약가제도 필요하다"면서도 "제약산업을 세계 7대 강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산업이 육성될 수 있는 (약가)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행 약가인하 정책으로는 산업 육성을 기대할 수 없어 정부가 목표하는 '제2의 반도체 산업'으로 제약산업을 육성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예측가능하고 합리적인 선에서 보건산업과 보험재정이 균형을 취할 수 있는 (약가)정책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