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시민사회 “심사 강화로 보험금 지출 절감…개인질병정보 악용 우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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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실손보험료 청구업무를 병의원에 위탁하는 방안을 재추진키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는 이를 통해 환자의 실손보험금 지급 편의를 제고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의료계와 시민사회는 실손보험 심사강화에 따른 의료이용권 제한, 개인 질병정보 유출 가능성 등을 제기하며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이른바 '실손의료보험금 청구절차 간소화' 방안을 담은 올해 업무계획을 확정했다.

핵심은 병의원을 통한 보험금 청구대행 서비스다. 환자가 요청한 경우 의료기관이 '전자적' 방식으로 해당 환자의 진료비 내역 등을 보험회사에 직접 보내도록 청구절차를 개편, 환자가 병원에서 보험금을 청구하고 수령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사업추진 일정도 구체화했다. 금융위는 올해 상반기 보험사와 의료기관, ICT 업체와 시스템 구축 등 실무협의를 마무리 한 뒤 하반기 서비스 시범운용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사업 활성화를 위해 내년에는 서비스 활성화 지원에 주력하며, 필요에 따라 보험업법 등 관련 법령의 개정도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금융위는 "이를 통해 환자의 불편과 소액보험료 낙전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의료계의 시각은 이와 반대다. 청구대행 추진은 실손보험 심사 강화를 위한 수순으로, 국민의 편의를 제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의 의료 이용권을 제한할 것이라는 우려다. 아울러 민감한 개인진료정보가 민간보험사에 체계적으로 축적돼 보험상품 개발 등에 있어 보험사 영리추구에 악용될 수 있다는 걱정의 목소리도 높다. 

실손보험 개편 유구한 역사, 의료계 반대 이유있다 

금융위원회는 이번 발표를 통해, 실손보험 청구대행이 국민의 보험료 수령 편의를 제고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금은 환자가 보험사와 직접 접촉해 복잡한 청구서류를 작성해야 하지만, 병의원이 맡아 직접 청구하는 방식으로 변경하면 청구절차가 간편해지는 만큼 환자가 받아야 할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아 지불받지 못하는 '낙전효과'가 줄어들 것이라는 얘기다.

환자의 편의만을 생각한다면 의료계의 반대가 '오버'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간의 '역사'를 들여다보자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앞서 금융위원회는 2012년 8월 실손보험 심사강화를 골자로 하는 '실손보험 종합개선대책'을 발표, 의료계 안팎에 큰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당시 금융위원회는 개별 보험사가 비급여 의료비를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실손보험 심사업무를 위탁해 청구내용 확인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보험개발원을 '실손보험 심사위탁 대행기관'인 보험정보원으로 확대 개편하고, 심평원과 보험개발원이 공사보험의 진료정보와 심사정보를 공유하도록 하자는 계획도 내놨다.

실손보험의 손해율이 매년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이로 인해 보험료 인상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불필요한 보험금 누수를 막아, 궁극적으로 국민 보험료 부담을 낮춰야 한다는 논리였다.

의료계와 시민사회는 반발했다.

금융위 계획대로 실손보험 심사를 심평원에 위탁할 경우 실손보험에 대한 심사가 강화돼 관련 진료가 위축될 우려가 크며, 여기에 더해 보험정보원을 설립해 공사보험 간 정보공유가 정례화 될 경우 공보험의 진료정보가 민간으로 유출, 악용될 수 있다는 것.

정부가 민간보험사의 이익보전을 위해 국민의 건강정보를 보호할 책임을 방기하고, 건강보험과 '보충형' 민간보험의 역할 구분을 해치려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다.

심사강화 대신 청구대행 전면에...금융위, 전략수정?

의료계와 시민사회, 국회의 거센 반발로 금융위의 심사위탁-공사보험 정보공유 방안은 무위로 돌아갔으나, 금융당국은 지난해 3월 '실손보험 안정화 방안'이라는 이름으로 실손보험 개선작업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톤'이 달라진 것은 이때부터다. 금융위는 심사강화와 보험금 누수방지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대신 병의원 청구대행과 그에 따른 국민 편익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병의원이 청구를 대신해주면 국민이 편해진다는 논리다.

의료계는 의구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청구대행은 금융당국이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던 심사강화를 위한 수순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의료계는 병의원을 통한 청구대행 서비스가 어느 정도 활성화돼 의료기관이 실손의료보험 진료내역을 온라인으로 송수신하는 환경이 조성되면, 정부가 이에 더해 실손보험 심사업무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 위탁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서인석 보험이사는 "실손보험 개선방안의 핵심은 비급여 청구서식의 표준화, 청구내역의 전산화에 있다"며 "심사의 체계화와 진료정보의 공유를 위해서는 팩스나 우편을 통해 산발적으로 수집되는 진료비 청구내역 정보들을 전자적 방식을 통해 수집, 집적, 체계화하는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 금융당국의 행보로 볼때 국민 여론을 내세워 병의원 청구대행 시스템을 일단 체계화한 뒤, 추후 심사위탁 등 후속조치에 들어갈 것"이라며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병원협회·대한치과의사협회·대한한의사협회·대한약사회 등 의약단체들은 "소액보험료 청구를 간편하게 한다는 것은 미끼일 뿐 결국 국민들의 의료서비스 이용을 제한하고, 의료비 지출을 절감해 민간보험사의 보험료 지급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은 "지금은 실손의료보험의 보건의료기관 대행청구를 말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모든 실손의료보험의 심사를 심평원으로 이관시키는 수순을 밟을 것"이라며 "실손보험을 심평원에서 심사해 건강보험의 기준으로 적정성을 평가하는 것은 국민의 건강권, 재산권을 침해하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무기록 타인 열람' 위법 논란...개인정보 유출 우려 여전

개인정보 유출 우려 또한 여전하다.

서 보험이사는 "개인질병 정보는 매우 민감한 자료로, 이를 민간보험사가 체계적으로 집적해 활용할 수 있게 되면 정보와 행정력에 우위가 있는 보험사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라며 "외국과 달리 심사거절이 쉬운 우리나라에서 이런 정보는 민간보험사의 ‘cream skimming(손해 보는 환자는 가입 거절)’에 악용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간보험사의 심사업무 편의를 위해 민간자원인 의료기관, 또 공공자원인 준공공기관을 강제 동원하겠다는 점도 행정편의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보험사가 심사를 하려면 당연히 적정한 행정비용을 들여야 한다"며 "이를 아끼기 위해 의료기관에 행정업무를 가중시키는 것은 수혜자 부담원칙에 맞지 않다"고 밝혔다.

그는 "심평원은 원래 건강보험을 위해 세팅된 기관으로 실손보험 심사에 적합하지 않다"며 "건강보험법상 청구를 위해 개발된 EDI를 무상으로 민간기업이 사용하는 것도 국가행정 기강면에서 맞지 않는 일이다. 심평원이 삭감을 하면 할 수록 민간보험사의 이득이 증가한다는 점도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금융당국 하반기 시범사업  타임테이블 구체화

의료계의 반발에도 금융당국은 실손보험 청구대행을 위한 작업을 구체화해 나가고 있다. 과거와 달리 이번 발표에서는 하반기 시범사업 추진 등 타임테이블이 구체적으로 나왔다.

상황에 맞물려 삼성화재와 핀테크 기업인 지앤넷(G&NET)이 협력해 만든 청구간소화 서비스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은 앞서 분당서울대병원과 MOU를 체결한 바 있다. 

의료계는 분당서울대병원의 사례가 청구대행사업 확대의 단초가 되지 않을런지 우려하고 있다.

의료계는 일단 청구대행 서비스가 시작되면, 굳이 법 개정을 통해 청구대행 서비스를 의료 기관의 의무사항으로 규정치 않더라도, 대부분의 의료기관에 '사실상 의무'로 적용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일단 서비스 시행으로 환자들의 보험료 청구 패턴이 달라지면, 전 의료기관들이 서비스 제공을 사실상 강요받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분당서울대병원 측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분당서울대병원 관계자는 "MOU 이후 병원 고문변호사에게 자문을 받은 결과, 불법이라는 답을 받은 이후 더 이상 어떤 후속조치도 진행한 적이 없다"며 "현재 청구대행서비스와 관련해 진행되고 있는 사항은 전혀 없으며, 민간보험회사의 제안을 받은 것도 없다"고 밝혔다.

제3자를 통한 청구대행 서비스가 법 위반 사항에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정부 내에서도 해석이 엇갈린다.

복지부는 청구간소화 서비스의 구동이 의무기록 타인열람을 금지한 의료법 21조에 위반될 가능성이 크다며 우려의 입장을 전한 상황. 반면 금융위원회는 문제될 것 없다는 뜻을 병원 측에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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