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허구분' 강조하던 법원, 왜 달라졌나...'경계' 애매한 의료법, 외부개입 부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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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진료영역'이란 것이 실제 존재하는 것인지조차 의문스럽다. 이대로라면 의사와 치과의사, 의사와 한의사를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단단할 줄만 알았던 성곽에 틈이 생겼다. 작은 균열은 시간이 갈수록 벌어져, 어느새 담벼락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의료인 '진료영역'에 관한 얘기다.

사법부가 의료인 간 진료영역 경계를 뒤흔드는 판결들을 잇달아 내리면서, 의료계가 충격에 빠졌다.

오랫동안 의사의 전문영역으로 정의돼왔던 보톡스 시술과 프락셀 레이저 시술(안면부)이 사실상 치과의사-의사의 공동영역이 됐고, 한의사 뇌파계 사용마저 합법과 위법의 경계선에서 사법부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의료계는 60년 넘게 이어져 온 면허제도의 근간이 무너졌다며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 의사의 정체성마저 의심받고 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치과의사 안면부 보톡스-프락셀 레이저 시술 '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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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8월 28일 환자의 얼굴에 미용목적으로 프락셀 레이저 시술을 시행, 의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치과의사 A씨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A씨는 1심에서 유죄,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이날 대법원 판결로 무죄를 확정받았다. 사실상 치과의사의 안면부 프락셀 레이저 시술은 '합법'하다는 판단이다.

대법원은 그에 한달 앞서 진행된 치과의사 미용목적 보톡스 시술 사건과 관련해서도 '합법' 취지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마찬가지로 안면부 보톡스 시술이 치과의사의 면허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봤다.

8월 26일에는 한의사 뇌파계 사용을 허용하는 취지의 판결이 나와 충격을 안겼다.

해당 한의사는 현대의료기기인 뇌파계를 이용, 치매와 파킨슨병을 진단하는 등 면허범위 외 의료행위를 한 혐의로 행정처분을 받았으며, 1심 법원은 복지부의 처분이 적절하다고 판단했으나 2심 법원이 이를 뒤짚었다.

'면허구분' 강조하던 법원, 왜 달라졌나

일련의 판결에서 읽히는 사법부의 공통된 정서는 '변화'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또 수요자의 인식에 따라 의료행위의 개념, 또 각각의 진료영역 또한 변화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실제 대법원은 보톡스 사건 당시 판결문을 통해 "의료행위의 개념은 고정 불변인 것이 아니라 의료기술의 발전과 시대 상황의 변화, 의료서비스 수요자의 인식과 필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며, 전통적인 진료영역을 넘어 추가로 허용되는 의료영역이 새로 생겨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는 뇌파계 판결에서도 마찬가지.

2심 판결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은 "의료기술의 계속적 발전과 함께 의료기기 사용 역시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라며 "의료기기의 용도나 작동원리가 한의학적 원리와 접목돼 있으면 이의 사용을 허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다.

덧붙여 "과학 기술 발전으로 의료기기 성능이 대폭 향상돼 보건위생상 위해 우려 없이 진단이 이뤄질 수 있다면 뇌파계 개발과 뇌파계를 이용한 진단 등이 현대의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의사 뇌파계 사용이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라고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과거 한의사 CT 판결, 한의사 IPL 판결 때 "국내 의료체계는 이원적으로 구분되어 있고, 한의사가 해당 의료기기를 사용해 진단이나 치료를 한 행위는 한방의료행위로 보기 어렵다"며 엄격하고 단호한 판단을 유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사법부 내부의 기류가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며 "전통적인 진료영역의 구분이 흐릿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법원 판단 따라 의료인 업무범위 재규정

애매한 의료법도 사법부의 개입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의료법상 면허별 의료행위의 범위가 구체화되지 못하다 보니 사안별로 사법부에 판단을 구하는, 다시 말해 법원의 판단에 따라 의료인의 업무범위가 사실상 재규정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대법원은 보톡스 사건 판결문에서 "의료법이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한 것은 각 의료인의 고유한 담당영역을 정해 전문화를 꾀하고, 궁극적으로 국민의 건강을 보호·증진하기 위한 것"이라며 "이에 의료인이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경우 형사처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문제는 막상 그에 관한 구체적인 규정이 없다는 데 있다. 법원은 이를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합리적인 법 해석의 여지를 둔 것으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의료법은 막상 각 의료인에게 면허된 의료행위의 내용이 무엇인지, 어떤 기준에 의해 구분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며 "이는 의료행위의 종류가 다양하고 그 개념도 의학의 발달, 사회의 발전, 의료서비스 수요자의 인식과 요구에 수반해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는 것을 감안해, 법률로 일의적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시대적 상황에 맞는 합리적인 법 해석에 맡기는 유연한 형태가 더 적절하다는 입법의지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봤다.

결국 이 같은 상황이 법률에 관해서는 전문가이지만 의료분야에 있어서는 전문성을 담보할 수 없는 사법부가 각각의 진료영역을 규정하는 현실을 만들었다.

대한개원의협의회 노만희 회장은 "시대가 변했다는 것, 또 그에 맞춰 각각의 의료인의 역할이 달라졌다는 것을 누가 어떤 근거로 판단할 수 있겠느냐"며 "이대로라면 면허의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비판했다.

대한의사협회가 보톡스·프락셀 대법원 판결 직후, 국회와 정부에 의료법 개정을 촉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면허범위 명문화 불가능한가

다만 현실적인 한계도 존재한다.

앞서 정부는 의료법상 개별 의료인의 면허범위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있는 이유를 묻는 법원의 질의에 "입법적 한계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의료법상 개별직종의 면허범위를 표시할 수 있는 방법으로, 법률가들은 열거주의 혹은 포괄적 행위규정을 든다.

열거주의란 모든 의료행위를 법률에 말 그대로 모두 적어주는 방식. 그러나 수백 수천 가지의 의료행위를 모두 명문화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데다 새로운 의료기술이 나올 때마다 매번 입법 정비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한계가 있다.

포괄적으로 행위를 규정하는 방식은 현행 법과 별다른 차별점을 둘 수 없다는 점에서 고려대상에서 제외됐다. 개별 의료인의 면허범위를 대략적으로 기술할 수는 있겠으나, 각각의 행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해석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이번 판결이 당황스러운 것은 사실 복지부도 마찬가지다.

현재 진행 중인 뇌파계 소송은 행정처분 취소소송으로 복지부가 피고, 즉 소송 당사자다. 복지부는 2심 패배 후 바로 항소를 준비하고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정부도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며 "다만 가까운 일본의 경우에도 최고 재판소에서 각각의 진료범위, 영역에 관한 부분들이 정해지고 있다. 입법상의 한계로 유독 우리 법 체계만 이 같은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의료계 연이은 충격파 당혹…대책 마련 분주

일련의 상황에 의료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대법원 판결 직후 입장문을 내어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의협은 "각 의료인의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고려하지 않은 채 면허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것은 의료법에 정한, 면허제도의 근거를 뿌리채 흔드는 것"이라며 "무면허 의료행위의 만연으로 국민 건강에 심각한 위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국민의 건강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의 기본권 보호 의무에 역행하며, 의료행위를 전문적 지식과 경험 여하에 관계없이 누구나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든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의협 김주현 대변인은 "치과의사 프락셀 시술의 위험성, 부당성을 알리는 토론회, 사진전을 여는 등 전문가단체가 다양한 경로로 의견을 전달했음에도 법원의 판단이 달라지지 않았다"며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의협은 프락셀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더 이상 비전문가인 법원에 면허범위, 진료영역에 대한 판단을 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 국민들이 올바른 선택을 해나갈 수 있도록 치과의사 미용시술의 위험성을 국민들에게 직접 알려나가겠다는 입장이다.

김주현 대변인은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합병증"이라며 "치과 의료기관의 경우 합병증 발생시 즉각적인 대응이 어렵다. 그에 관한 위험성들을 적극적으로 알려 나가갈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의료분야 영역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 앞으로는 의료와 의료인 면허제도에 대한 비전문가인 법관의 판단에 맡기지 않고, 의료전문가 단체 스스로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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