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에서 폴리필까지

 
 

만성질환을 예방하고 치료하는데 필수적인 약물전략이 단독에서 병용으로, 병용에서 복합제로, 2제병용 복합제에서 다중약물 복합제 폴리필(polypill)로 진화하고 있다. 약물 병합요법의 이론적 배경은 만성질환의 병태생리적 기전에서 찾을 수 있다. 개별 질환들이 워낙 다양한 병태생리 루트를 통해 발생하기 때문에, 하나의 루트만을 단독으로 막거나 공략해서는 수성(守城)이나 공성(攻城)에 실패하기 쉽다.

여기에 만성질환들이 상호작용하며 다중으로 동반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특정 위험인자 하나만 잡아서는 질환발생을 막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사증후군이다. 고혈압·고혈당·이상지질혈증·비만 등이 한번에 동시다발되는 병태로, 해당 위험인자들을 개별이 아닌 집합체로 보고 종합관리해야 한다.

 

The Lower, The Better
고혈압 분야에는 최근 ‘the lower, the better’ 접근법을 놓고 말이 많다. SPRINT 연구가 불을 붙였다. 심혈관질환 고위험군인 고혈압 환자에서 기존의 수축기혈압 목표치 140mmHg보다 낮게 조절한 결과, 더 우수한 심혈관사건 감소혜택을 얻었다. 정상혈압에 해당하는 120mmHg 미만까지 낮춘 결과다. 최근의 메타분석에서는 수축기혈압을 10mmHg 낮출 때마다 심혈관사건과 사망 위험이 각각 20%와 13% 감소했다.

The More, The Lower
그런데 ‘the lower’ 혈압조절을 위해서는 ‘the more’ 항고혈압제가 전제돼야 한다. 미국고혈압학회(ASH)는 “고혈압 환자의 70% 이상이 병용요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항고혈압제 단독요법으로는 혈압을 원하는 목표치까지 끌어 내리기 힘들다는 말이다. SPRINT 연구에서 120mmHg 미만을 목표로 한 집중 혈압조절군에게 사용된 평균 항고혈압제 수는 3개였다.

고혈압 치료에 있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명제 중 하나는 “한 가지 루트만 표적으로 공략하는 단일요법으로는 혈압을 정상화시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ASH의 보고에 따르면, 354개의 무작위·대조군 임상시험(RCT)을 메타분석한 결과 단일성분 항고혈압제의 평균 강압효과는 9.1/5.5mmHg에 불과했다. 반면 상호보완 작용의 항고혈압제를 병용할 경우 단일약제의 용량을 증가시키는 것에 비해 5배 정도의 추가 강압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Am J Med 2009;122:290-300).

The More, The Better
항고혈압제 치료에서 ‘하나보다 둘이 좋다’는 명제는 단순히 혈압조절의 양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 즉 궁극적인 심혈관합병증 개선에 있어서도 합격점을 받고 있다. 최근까지 병태생리학적 측면에서 고혈압 발생의 다양한 경로(physiological pathways)들이 밝혀졌다. 이를 기반으로 각각의 루트를 공략하는 새로운 계열의 항고혈압제가 탄생할 수 있었다.

사방팔방에서 밀려오는 적을 맞아 한 곳에만 전력을 집중시킬 경우, 수성(守城)에 성공하기 힘들다. 때문에 차별화된 기전을 통해 질환의 원인이 되는 여러 표적을 동시에 공략할 수 있는 병용요법은 고혈압과 심혈관합병증 증가를 막는 데 필수적인 전략이다.

현재까지 공개된 일련의 임상연구들에서는 항고혈압제 병용요법을 통해 혈압조절은 물론 궁극적인 심혈관합병증 위험까지 개선할 수 있음이 보고돼 왔다. 심혈관질환 고위험군 환자들에게 조기에 항고혈압제 병용요법을 적용할 경우 탁월한 혈압조절 혜택으로 인해 심혈관사건 및 사망률까지 끌어내릴 수 있었다. ADVANCE, ADVANCE-ON, ASCOT-BPLA, ASCOT-LLA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인 이상지질혈증

 

한국지질동맥경화학회의 Dyslipidemia Fact Sheet in Korea 2015에 따르면, 우리나라 이상지질혈증의 유병률은 고LDL콜레스테롤혈증이 15.5%, 고중성지방혈증 18.6%, 저HDL콜레스테롤혈증 28.4%로 집계됐다. 먼저 고LDL콜레스테롤혈증이 과거보다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지난 12년 사이 계속해서 한국인의 고LDL콜레스테롤혈증 유병률이 증가하는 가운데, 최근 4년 사이에 증가폭이 35%에 이른다”는 연구보고도 있다.

두 번째 특징은 고중성지방혈증과 저HDL콜레스테롤혈증의 위험도가 높다는 것이다. 한국인 이상지질혈증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고LDL콜레스테롤혈증, 고중성지방혈증, 저HDL콜레스테롤혈증이 겹치는 복합형 이상지질혈증이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를 두고 죽상동맥경화증 호발성 이상지질혈증이라고도 하는데 상대적으로 심혈관질환 위험이 더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타틴 + 비스타틴계
이상지질혈증 치료에서는 ‘the lower, the better’ 접근법이 거의 통설로 자리한다. 심혈관질환 초고위험군에서 LDL 콜레스테롤을 최대한 많이 끌어 내리는 것이 심혈관사건 감소혜택을 담보한다.

스타틴이 이상지질혈증의 대표적인 치료제인 것은 불변의 진리다. 하지만 단독요법만 가지고, 더욱 강력해진 지질이상 병태를 치료해 심혈관질환 이환과 사망위험을 완전히 막아내는 데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학계는 이를 두고 이상지질혈증 환자의 심혈관질환 잔여 위험도(residual visic)라고 지칭한다.

스타틴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상현장에는 지질 목표치를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여전히 많다. 일선 진료의들은 심혈관질환 초고위험군 환자들이 스타틴이 주를 이루는 지질저하 약물치료를 받고 있지만, 상당수가 목표치 달성에 실패한다고 말한다. 지원군이 필요하다.

미국당뇨병학회(ADA)는 이를 고려해 새 가이드라인에서 “중강도 스타틴에 에제티미브를 추가하는 병용전략이 중강도 스타틴 단독요법과 비교해 부가적인 심혈관 혜택을 제공한다”며 “최근 급성관상동맥증후군(ACS)을 경험한 환자 가운데 LDL 콜레스테롤이 50mg/dL 이상이거나 고강도 스타틴에 불내약성을 보이는 경우 (병용요법을)고려해 볼 수도 있다”고 권고했다.

LDL·TG·HDL 다잡는 병합전략
스타틴의 주요 기전은 LDL 콜레스테롤 조절이다. 높은 중성지방(TG)나 낮은 HDL 콜레스테롤의 환자를 치료할 수는 없다. 특히나 한국인 이상지질혈증 환자들은 고중성지방혈증, 저HDL콜레스테롤혈증 위험이 높다. 때문에 스타틴 단독만을 적용해서는 심혈관질환 잔여 위험도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힘들다.
추가적인 혜택을 줄 수 있는 병용 파트너가 필요한 이유다. ADA는 이와 관련해  “중성지방이 204mg/dL 이상이면서 HDL 콜레스테롤이 34mg/dL 이하인 경우에 스타틴과 페노피브레이트 병용요법을 고려해 볼 수도 있다”며 환자의 임상특성에 따른 맞춤형 지질치료를 주문했다.

한국인 당뇨병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인은 최근 당뇨병 병태생리의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과거 서양인에 비해 떨어지는 췌장 베타세포 기능이 당뇨병의 주원인으로 작용했던 우리나라 환자들에서 최근 비만과 인슐린 저항성이 새롭고 주된 인자로 병태생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

전통적인 인슐린 분비능 저하와 서구화의 산물인 인슐린 저항성 증가를 비롯해 비비만형과 비만형 당뇨병이 뒤엉켜 있다. 가뜩이나 인슐린 분비능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인슐린 저항성의 공격까지 받다 보니 베타세포 기능부전에 의한 당뇨병 위험에 더욱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다양 공격루트 맞춰 수비진 병용배치
때문에 우리나라 제2형 당뇨병 환자들은 하나의 루트만을 막아내는 혈당강하제 단독요법만으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힘들다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인슐린 민감도 개선과 인슐린 분비능 촉진 계열의 약물전략이 모두 필요한 상황이다. 대한당뇨병학회의 ‘Korean Diabetes Fact Sheet 2015’를 보면, 한국인 당뇨병 유병특성에 따른 혈당강하제 처방패턴의 변화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2002~2013년 사이 약물치료 전략을 보면, 단독요법은 줄고 2·3제요법의 병용이 늘고 있는 것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2제병용은 35.0%에서 44.9%로, 3제요법은 6.6%에서 15.5%로 증가했다. 2·3제요법을 모두 합치면 병용약제로 치료받고 있는 당뇨병 환자들이 60%에 달한다. 제2형 당뇨병의 병태·생리학적 발병루트가 다변화되면서, 이에 따른 치료전략의 다변화 역시 요구받고 있다.

특히 2제요법에서는 메트포르민 + 설폰요소제(41.7%), 메트포르민 + DPP-4 억제제(32.5%)의 병용이 우세를 점했다. 메트포르민은 간에서 당 생성을 낮추는 동시에 말초 인슐린 민감도를 개선하는 기전이다. 설폰요소제와 DPP-4 억제제는 대표적인 인슐린 분비 촉진 계열이다.

대사증후군 30%

 

한국인의 심혈관 건강과 관련해 가장 심각한 문제는 대사증후군 유병률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대사증후군은 HDL 콜레스테롤 수치가 남자 40mg/dL·여자 50mg/dL 이하이면서 혈압(130/85mmHg), 혈당(100mg/dL), 중성지방(150mg/dL)은 높고 복부비만(남자 90cm, 여자 85cm 이상)인 경우를 말하는데 이 중 3가지 이상의 증상이 있으면 진단할 수 있다.

국민건강영양조사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유병률을 조사한 결과 1998년 24.9%에서 2001년 29.2%, 2005년 30.4%, 2007년 31.3%로 일관되게 증가했다. 10여년 사이 6.4% 증가한 가운데, 우리나라 성인인구(20세 이상) 3명당 1명이 대사증후군 환자다.

“다중약물 병합으로 위험인자 종합관리 시대”
가천대길병원 심장내과의 고광곤 교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령으로 갈수록 대사증후군 유병률이 큰 폭으로 증가해 60대 이상은 2명 중 1명꼴”이라며 “지금은 하나의 심혈관 위험인자만을 갖고 있더라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추가·동반되는 위험인자의 개수가 계속 늘게 된다”며 심혈관 위험인자 다중발현의 위험성을 지적해 왔다.

“때문에 현재 문제가 되는 하나의 위험인자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향후 동시발현될 가능성이 높은 여타 위험인자까지 종합적으로 관리해 사전에 차단하고, 이를 통해 심혈관질환의 발생을 미리 막는 것이 새로운 치료 패러다임”이라는 설명이다. 고혈압·이상지질혈증·고혈당·비만 등을 동시에 포괄적으로 치료해야 하는 다중약물 병합요법의 시대는 이미 도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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