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적 의료체계 규정한 입법 목적과 어긋나

 

법원이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은 불법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의료인이라도 각기 허가된 면허 범위 내에서만 의료행위를 할 수 있고, 현대의료기기 사용은 한의사의 면허 범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법원의 일관된 판단이다.

카복시시술·초음파진단기 사용 한의사에 벌금형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카복시시술, 초음파진단기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한의사 2명에 대해 모두 유죄를 인정하고 각각 벌금 80만원을 선고했다.

이들의 법적 쟁점사안은 '의료기기의 사용이 한의사의 면허에 포함되는 의료행위'라는 점으로, 두 사람 모두 의료기기를 사용한 자신들의 의료행위가 한의사의 면허범위에 포함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한의사들이 주장하는 것을 모두 배척하고 유죄를 인정했다. 한의사가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는 것은 한의사의 면허 범위 내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먼저 카복시 시술을 한 A씨에 대해서는 의료법 등 법령에서 한의사의 기복기 사용 또는 카복시 시술을 금지하는 법령은 없지만 사실관계 등에 비춰보면 A씨가 기복기를 사용해 카복시 시술을 한 것은 한의사의 면허범위에 포함된 의료행위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또한 초음파진단기를 사용한 B씨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한의사의 면허에 포함되는 한방의료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의료법령에서 한의사로 하여금 초음파진단기의 사용을 금지하는 규정은 없지만 이원적 의료체계의 목적, 의료행위와 한방의료행위의 개념,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진단방법의 차이, 초음파진단기의 원리 등에서 알 수 있는 사정에 비춰보면 B씨가 초음파진단기를 사용해 환자의 자궁, 자궁내막을 확인하는 행위는 한의사의 면허에 포함된 의료행위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CT·IPL·필러 시술 판례서도 한의사 ‘유죄’

이번 카복시시술·초음파진단기 사용 외에도 한의사가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했다 처벌받은 판례들은 다수 존재한다. 관련된 대법원 선고도 수차례 있었고, 최근에는 헌법재판소에서도 위헌 여부를 판단했는데 이 판결들의 공통점은 '사용해선 안 된다'라는 점이었다.

지난 2006년 선고된 서울고등법원 판례는 한방병원 한의사가 CT를 사용했다 적발된 사건으로, 당시 재판부는 "국내 의료체계는 이원적으로 구분돼 있고, CT와 관련된 규정들은 한의사가 CT를 이용하거나 한방병원에 CT를 설치하는 것을 예정하고 있지 않다"며 "한의사가 CT를 사용해 방사선 진단행위를 한 것은 한방의료행위에 포함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 관련 판결 중 가장 유명한 광선조사기 'IPL(Intensive Pulsed Light)' 사건 역시 위법성을 인정했다.

대법원은 "IPL이 적외선·레이저침을 이용해 경락에 자극을 줘 질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적외선치료기·레이저침치료기와 작용원리가 같다고 보거나, IPL을 사용한 피부질환 치료가 빛을 이용해 경락의 울체를 해소하고 온통경락하기 위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지난 2014년 선고된 한의사의 필러시술과 관련된 대법원 판례도 위법성이 인정됐다.

필러시술은 피부 주위에 히알루론산을 직접 주입해 시술한 부위의 피부층을 높임으로써 전체적인 얼굴 미관을 개선하려는 의료행위이고, 히알루론산 역시 첨단장비를 이용해 박테리아를 발효시켜 생산하는 것으로 한약이라고 볼 수 없어 필러시술은 전적으로 서양의학의 원리에 따른 시술이라는 게 당시 재판부의 설명이었다.

이원화된 의료체계 따져 위법성 판단

카복시시술, 초음파진단기와 관련된 법원의 판단 기저에는 의학-한의학으로 구분된 우리나라의 독특한 이원적 의료체계를 규정한 입법 목적이 깔려 있다.

실제 해당 재판부는 의료법이 의사와 한의사가 각자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수 없도록 이원적 의료체계를 규정한 것은 각자의 영역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의료에 관한 전문지식과 기술을 검증받은 범위를 벗어난 의료행위를 한 경우, 사람의 생명·신체나 일반 공중위생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판단했다.

이와 관련해 법원 관계자는 "의료법 등 관련 법령을 살펴보면 의학-한의학으로 구분된 우리나라 의료현실에선 각각의 업무영역 등이 규정돼 있다"며 "따라서 한의사가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는 문제는 현행 의료법상 위법하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라고 밝혔다.

또한 재판부가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에 있어 위법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은 판례도 등장했다. IPL을 사용한 한의사에게 유죄가 선고된 대법원 판례이다.

당시 판결의 쟁점은 한의사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의료기기나 의료기술 이외에 새로 개발·제작된 의료기기 등을 사용하는 것이 한의사의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와 한의사가 IPL을 이용해 행한 시술행위가 한의학적 원리에 의한 것인지 여부였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의료기기 등을 사용한 것이 한의사의 면허범위 내의 의료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해 판단기준을 제시했다.

△관련 법령에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을 금지하는 규정이 있는지 여부 △의료기기 개발·제작 원리가 한의학의 학문적 원리에 기초한 것인지 여부 △의료기기 등을 사용하는 의료행위가 한의학의 이론이나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 △의료기기 등의 사용에 서양의학적 기술이나 지식이 필요하지 않아서 한의사가 이를 사용하더라도 보건위생상 위해가 생길 위험이 없는지 여부 등이 그것이다.

이번 초음파진단기 사용과 관련된 판결만 봐도, 재판부는 "초음파진단기는 초음파가 반사되는 시간을 거리로 변환해 조직의 위치를 표현하고 초음파로부터 반사되는 에너지량을 밝기로 변환해 조직의 물성을 표현한다"며 "초음파진단기는 서양의 현대과학에 기본 원리를 두고 개발·제작된 것으로, 한의학의 이론이나 원리에 기초해 개발·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카복시시술과 관련해서도 "이 시술은 이산화탄소의 물리적 특성 및 이산화탄소에 반응하는 인체 조직의 생화학적 특성에 근거를 둔 것으로, 피고인이 기복기를 한의학적으로 응용한 기침요법 또는 경피기주요법의 일환으로 카복시 시술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행위가 전통적인 한의학의 이론이나 원리를 기초로 했거나 이를 응용한 치료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유화진 변호사(대한의사협회 전 법제이사)는 "이번 판결들을 살펴보면 카복시 시술이나 초음파진단기를 한의사들이 많이 사용한다고 해도 한의학적 원리는 없는 것이라고 재판부가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대한한의사협회 김필건 회장(사진 가운데)은 지난해 기자회견을 열고 골밀도 측정기 공개시연을 진행했다.

'의대-한의대 교육과정 70% 일치' 한의협 주장은?

한의협은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주장하면서 '의대와 한의대 교육과정이 70% 이상 일치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왔다. 이에 대해 법원에서는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까?

이번 초음파진단기 사용 소송에서 한의사 측에서 한의협의 논리를 재판부에 제출했기 때문에 판결문에 이에 대한 부분이 명기돼 있는데 "피고인이 한의학과에서 초음파 관련 과목을 수강했고 한의사로 일하면서 한방초음파장부형상학회에서 초음파진단기에 대한 수련을 계속 받아온 것으로 보인다"고 한의사가 배웠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배웠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게 이번 판결에서 보이는 재판부의 태도다.

재판부는 "의료법 등 관련 법령에 따르면 영상의학과는 초음파진단기, CT, MRI 등 영상 의료기기를 이용해 얻어진 정보를 의학적 교육, 연구 및 임상적 경험을 통해 관찰해 영상에 나타난 질병의 징후 등에 관한 진단을 내리고 이를 근거로 환자의 질병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의학의 전문 진료과목"이라며 "한의사 전문의의 경우 초음파 진단기를 사용해 진단을 하는 전문과목이 포함돼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초음파진단기를 사용한 검사 및 진단 행위는 기본적으로 영상의학과의 전문 진료과목"이라며 "초음파진단기를 사용한 검사, 진단행위가 비교적 간단하다고 볼 수 있지만 영상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데 있어서는 인체 및 영상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영상의학과 의사나 초음파에 대해 경험이 많은 해당과의 전문의사가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이해관계 조정해 입법적으로 해결하는 게 바람직”

의료계와 한의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에 대해 법원은 어떤 해결방안을 내릴 수는 없지만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했다.

한의사가 의료기기 등을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는 의사와 한의사 등 이해 당사자들이 각각의 학문적 발전과 의료서비스의 질적 향상 도모 및 의료서비스 선택의 폭 확대라는 여러 사정을 고려하고,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정해 '입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언급한 것.

이에 대해 유 변호사는 "재판부의 의중은 의학-한의학으로 이원화된 우리나라 의료체계에서는 입법적으로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의사가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 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재판부가 한의사가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며 "현대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한의사도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현행법상 불법이기 때문에 한의사가 의료기기를 사용하려면 관계 법령을 개정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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