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生)와 타나토스(死)의 의미를 성(性)과 죽음이라는 의미로 바꾸어 생각할 때, 이것은 인간사회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것으로 여겨온 과제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는 인간사회를 엄격히 규제하는 많은 규칙을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도덕과 터부의 중심이 되는 것은 성과 죽음의 문제이며 이것이 공동체의 삶을 지탱하는 두개의 축이 되었으며 여기서 발생되는 혼란은 공동체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영역을 슬기롭게 규제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는 공동체 전체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되었다. 그래서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이 두 문제를 엄격한 도덕과 터부의 대상으로 묶어놓고 감시해왔다.

사랑과 죽음의 관계 시대마다 변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동일시하는 것은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그러나 16세기부터는 이 전통에 새로운 변화가 생겨 `에로스는 타나토스`로, 즉 `정욕은 사망에 이르는 길`로 여겼던 것이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서는 `타나토스는 에로스`, 즉 `죽음은 사랑이다`로 바뀌게 되었다.
 죽음은 사랑이 되고, 시체는 정욕의 대상이 되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등장한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가 이 시기부터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서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림 1은 한스 발둥(Hans Baldung, 1484-1545). 일명 그리언(Grien)이라 불리는 화가의 `죽음과 소녀`(1517)라는 작품으로 전설적인 메멘토 모리를 그림으로 한 것이다. 죽음의 사자가 소녀의 머리채를 잡고 죽음을 재촉한다.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모아 애원하며 삶을 체념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 작품은 중세가 끝날 무렵에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갖게 되는 공포감을 나타내고 있다. 죽음의 태도를 보면 다정한 포용이 아니라 소녀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휘어잡고 난폭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중세까지만 해도 죽음은 난폭하지 않았다. 종교적 의식 속에 갇혀 얌전하게 길들여 있었지만 이제 죽음은 서서히 야성화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16세기 초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태도인 것이다. 이 작품은 후에 바로크시대에 나타날 성에 대한 새로운 태도, 즉 사디즘(sadism)의 경향을 예고하고 있다.
 그림 2 역시 한스 발둥의 작품으로 `여인과 죽음`(1517)이라는 제목의 그림인데 이를 보면 죽음이 여인의 볼을 깨물고 있다. 여기서 사디즘은 카니발리즘(cannibalism)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이러한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모방해서 나타낸 문신이 그림 3 이며, 죽음의 상징인 해골이 여인을 매우 거칠게 다루고 있다.

우리 선조들 `연비(聯臂)`로 사랑 맹서
우리나라에서도 문신은 남녀간의 사랑을 맹서하고, 다짐하고, 간직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이렇게 사랑을 다짐하는 문신에는 글자와 그림이 쓰여지는데, 글자로는 대략 3백여 종류가 새겨진다. 이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글자로는 `일심(一心)`이 있으며, `사랑` 또는 `love`, 그리고 애인의 이름을 새기는데 한글 또는 영자로 그 이니셜만을 사용하기도 한다.
 일심이라는 글자는 주로 한문이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획수가 적고 간단하기 때문이며, 사랑이 변함없다는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나타내기 때문에 가장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글씨와 애인의 이니셜 또는 사귄 날짜 등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 표시의 그림으로 가장 많이 그려지는 것으로는 하트(heart)마크와 하트마크에 화살이 박힌 것인데 이는 자기의 사랑이 적중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그림 4>.
 때로는 불사(不死) 즉 사랑은 죽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死자 내에 두개골을 그려 넣어 메멘토 모리를 나타낸 문신이다<그림 5>.
 사랑에 빠진 남녀가 이를 기억하고 간직하기 위해 문신을 새긴 것은 우리의 옛 습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옛사람들은 그러한 사랑의 문신을 `연비(聯臂)`라고 하였다. 순조 때 문헌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우리 동방 여염의 탕자들은 결의를 하는데 바늘로 서로의 팔뚝을 찔러 먹칠을 한다.
 그 푸르기가 멍든 것 같아 이름하여 `연비(聯臂)`라 하는데 이로써 평생 불망(不忘)의 의로 삼는다. 이 모두는 버려야 할 악습인 것이다."
 즉 어떤 맹서나 결의를 배신할 수 없게끔 육체적으로 증거를 남기기 위해 문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사에서 가장 유명한 간통사건인 어을우동(於乙于同) 사건도 결국은 연비로 발각되어 끝을 맺는다.
 어우 동은 세종대왕의 형님인 효령대군의 손자며느리였다. 어우 동의 시어머니인 권씨는 남편을 잃은 상중에 어우 동의 남편인 태강수를 분만하고는 청상과부로 지내며 유복자 외아들 태강수만을 의지하고 살았다.
 이후 어우 동을 며느리로 맞게 되자 권씨는 며느리를 자기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원수처럼 여기게 되고 남편인 태강수와의 합방을 한 달에 두 번으로 제한하였다고 한다.
 자식을 얻기 위해 이것저것 가려 좋은 날을 택해야 한다는 구실로 부부간의 잠자리를 권씨가 일부러 방해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어우 동은 허구한 날을 독수공방으로 지냈으며 태강수는 기방 출입으로 젊음을 달랬다.
 자식이 태어나지 않자 권씨는 며느리에게 핍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어우 동은 제 발로 이 집을 뛰쳐나갈 것을 결심하고, 그녀는 집에 묵고 있던 은장이를 꼬이는 장면을 일부러 들키게 연출하여 소박을 자청했다.
 그리고는 태강수와 권씨 부인에게 복수를 다짐하면서 "이제부터 내 뜻대로 살련다. 당신의 노리개가 아닌 한 인간으로 살겠다"고 내뱉고는 집을 뛰쳐나갔다.
 집을 나온 어우 동은 섹스스캔들로 복수하기로 결심하고는 위로는 고관대작들과 왕족인 종친들로부터 아래로는 계집종의 비부(婢夫)며, 떠돌이 은장(銀匠)이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유인하여 음욕의 대상으로 하였다.
 이렇게 유인된 남정네들 가운데는 세종대왕의 손자를 포함해, 벼슬아치만도 삼십 여명에 이르러 당시의 윤리관에 큰 충격을 던진 사건이었다.
 이렇게 어우 동의 음풍에 연루된 자를 처벌하기 위해 수사한 결과 이들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어우 동의 양팔에 새겨진 문신 때문이었다.
 어우동의 양팔에는 그녀와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의 이름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으며, 팔이 모자라 등에까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결국 연비로 인해 신세를 망친 벼슬아치가 여러 명이었으며, 어우 동 자신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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