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환경호르몬과의 키스<2>

영하의 날씨,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는 편의점 온장고의 따끈한 커피 한잔. 그런데 카페인(caffeine)이나 폴리페놀(polyphenol) 같은 성분 외에 환경호르몬도 함께 마시고 있다면? 캔 커피 내부의 코팅제로 쓰이는 에폭시수지의 원재료는 대중에게 환경호르몬으로 잘 알려진 비스페놀 A이다. 모든 플라스틱 용기가 유해하다고 치부할 수 없지만 상당수 통조림과 캔음료, 커피전문점의 일회용 컵 심지어는 종이 영수증에도 비스페놀 A가 들어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겨울철 불티나게 팔리는 고가의 아웃도어 제품의 방수 가공에도 환경호르몬의 일종인 과불화화합물(PFCs)이 사용된다는 사실. 일회용 커피 컵, 샌드위치 포장지, 배달 피자 박스, 후라이팬과 같이 일상생활 중 흔히 접하는 소비재 역시 PFC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 당신은 매일 환경호르몬을 마시고 있다 <2> 환경호르몬 '먹고 만지고 입고' <3> 환경호르몬 관리, 개인에 맡겨선 안돼


비스페놀A, 성기능장애·고혈압 유발

"영수증, 받자마자 버려라."

얼마 전 모 방송에서 마트와 은행 등 10곳 중 7개 영수증에서 비스페놀A가 검출됐다고 보도하면서 관련 내용이 화제다.

1891년 러시아 화학자 디아닌(A. P. Dianin)에 의해 처음 합성된 비스페놀A는 폴리카보네이트(PC)나 에폭시수지 같은 플라스틱 제조원료로서 콤팩트디스크(CD)나 식품저장용기, 젖병, 캔 내부 코팅재료 등으로 널리 사용돼 왔다.

비스페놀A가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같은 활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포착된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인데, 난소가 없는 쥐에 비스페놀A를 주사하는 실험을 통해 비스페놀A가 합성 에스트로겐으로 작용할 수 있음이 밝혀진 뒤로 정자수 감소나 여성화 등 여성호르몬 과다와 관련된 증상들이 주로 지적되기 시작했다.

2008년 미국립보건연구소(NIH) 산하 국립독극물프로그램(NTP)이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비스페놀A를 주입한 실험용 쥐에서 전립선종양, 유방암, 성조숙증, 비뇨기계 이상 등이 발견됐다.

특히 환경호르몬 노출에 취약한 성장기 유아는 소량만 노출되더라도 전립선이나 유선조직의 변화가 일어나고 암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소변검사상 비스페놀A가 검출된 학동기 아동에게서 천명음(wheezing)과 같은 천식 증상이 발생할 확률이 2배 이상 높다는 국내 논문(PLoS One 2014;9:e111383)도 발표된 바 있다.

지난해에는 서울의대 환경보건센터 연구진이 캔음료에 든 비스페놀A가 수축기 혈압을 높인다는 논문(Hypertension 2015;65:313-9)으로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60명의 노인(평균연령 73세, 여성 56명)을 대상으로 플라스틱 라이닝 처리된 캔 또는 유리용기에 든 두유를 마시게 한 뒤 소변 비스페놀A 농도와 수축기혈압을 측정한 결과, 캔 제품을 섭취한 군은 대조군과 약 5mmHg의 혈압 차이를 보인 것. 비스페놀A 농도가 높을수록 심혈관질환 위험이 증가한다는 기존 역학적 근거를 강화한 셈이다.

주 연구자인 홍윤철 박사는 "향후 종단연구가 진행돼야 겠지만 일상생활에서 비스페놀A의 노출이 빈번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로 인한 혈압상승은 공중보건을 상당 수준 위협한다. 비스페놀A 노출을 막기 위해 보다 엄격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극지방서도 PFC 검출…안전지대는 없다

세계적인 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Greenpeace)가 지난해 말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10곳의 눈과 물 표본에서 과불화화합물(PFCs)이 검출됐다. PFC의 환경오염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린피스 탐사단은 2015년 5월 표본 채취를 위해 총 8개의 팀을 꾸려 PFC를 사용하지 않은 아웃도어 옷을 입고 산악지대로 탐사를 떠났다. 외부 영향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접근 가능하면서도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지역을 택했지만 중국의 하바설산, 러시아의 알타이산맥, 칠레 파타고니아의 토레스 델 파이네산맥에서조차 PFC가 나왔다.

PFC가 제품의 생산, 수송, 보관, 사용 중은 물론 폐기 후 소각, 배립하는 과정에서도 대기나 수로를 통해 자연에 유출되고, PFOA나 PFOS 같은 형태로 바뀌어 오염원이 없는 극지방까지 이동할 수 있다는 게 과학자들의 견해다.

PFC는 아웃도어 제품뿐 아니라 눌러 붙지 않도록 코팅된 후라이팬, 방수처리된 가구 등에도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특수처리를 명목으로 비싼 값을 치른 제품들이 도리어 환경호르몬을 유발한다니 역설적이다. 

특히 과불화화합물의 일종인 PFOA는 쥐를 이용한 동물 실험에서 기형 및 간독성을 유발하고 성적인 발달을 지연시키는 것으로 확인됐고, 인체에도 정자 질 저하, 저체중아 출산, 갑상선질환 등 다양한 건강문제를 일으킨다고 알려졌다.

최근 보고된 국내 코호트연구에서는 PFC가 평균치 이상 검출된 2세 아동이 키가 작고 체중이 낮아 상대적으로 성장발달이 지연됐다(Int J Pediatr Endocrinol 2015(Suppl 1):P31). 노인층에서도 PFDoDA 및 PFOS 농도가 높을수록 인슐린저항성(IR)과 산화스트레스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Eur J Nutr doi:10.1007/s00394-015-0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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