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1] 환경호르몬과의 키스

영하의 날씨,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는 편의점 온장고의 따끈한 커피 한잔. 그런데 카페인(caffeine)이나 폴리페놀(polyphenol) 같은 성분 말고도 환경호르몬을 함께 마시고 있다면? 캔 커피 내부의 코팅제로 쓰이는 에폭시수지의 원재료는 대중에게 환경호르몬으로 잘 알려진 비스페놀 A이다. 모든 플라스틱 용기가 유해하다고 치부할 수 없지만 상당수 통조림과 캔음료, 커피전문점의 일회용 컵 심지어는 종이 영수증에도 비스페놀 A가 들어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겨울철 불티나게 팔리는 고가의 아웃도어 제품의 방수 가공에도 환경호르몬의 일종인 과불화화합물(PFCs)이 사용된다는 사실. 일회용 커피 컵, 샌드위치 포장지, 배달 피자 박스, 후라이팬과 같이 일상생활 중 흔히 접하는 소비재 역시 PFC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 당신은 매일 환경호르몬을 마시고 있다 <2> 환경호르몬 '먹고 만지고 입고' <3> 환경호르몬 관리, 개인에 맡겨선 안돼


환경호르몬은 일본식 표현…정식 명칭은 '내분비계교란물질'

환경호르몬(environmental hormone)이란 생체 외부로부터 흡수돼 내분비 호르몬의 생리작용에 혼란을 일으키는 화학물질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 물질은 생명체의 성장발달과 항상성을 조절하는 호르몬과 화학적 성질이 유사해 호르몬의 정상적인 작용을 차단하기도 하고 왜곡 또는 증폭시키기도 한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환경호르몬이란 용어가 일본식 표현이란 사실.

1997년 5월 일본 NHK는 '환경 중에 배출된 화학물질이 생물체 내에 유입돼 호르몬처럼 작용한다'는 내용의 특집방송을 보도하면서 대중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환경호르몬이란 쉬운 용어로 바꾸었다.

일부 전문가 사이에서 호르몬이라는 단어 자체가 몸 속에서 합성된 물질을 의미하기 때문에 환경호르몬이라는 신조어에는 오류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내분비계 혼란을 일으킨다는 의미의 '내분비계 교란물질(endocrine disruptor)'이 정식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일본, 한국에서도 해당 용어를 권장하는 추세다.

현재 환경호르몬은 환경성 내분비계 교란물질의 좁은 의미로 사용되며, 오존층 파괴, 지구 온난화와 함께 세계 3대 환경문제로 거론되고 있다.


'환경호르몬의 저주' 1950년대 DDT 논란부터

환경호르몬에 의한 피해가 밝혀진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피해 징조는 사람보다도 조류, 양서류, 파충류 같은 동물에게서 먼저 발견됐다. 1952년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걸프 해안의 대머리독수리 가운데 80%가 불임이고, 짝짓기와 새끼 양육의 본능을 상실했다는 보고가 나왔다.

이 문제를 공론화 한 장본인은 미국의 해양생물학자 레이첼 카슨(Rachel L. Carson).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합성 살충제의 확산을 우려한 카슨은 1962년 '침묵의 봄(Silent Spring)'을 출간하고 DDT 같은 살충제의 오용이 자연환경과 인간에게 심각한 위험이 된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려 했다.

산업계는 물론 일부 정계 인사들로부터도 불안심리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온갖 비난과 공격이 쏟아지던 중 'CBS 리포트'란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카슨은 "인간과 자연은 둘 중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정복하거나 지배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은 결코 자연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라는 논리로 DDT의 효용성을 주장하는 상대방과 맞섰다.

이 방송을 계기로 당시 미네소타주 상원의원이었던 허버트 험프리(Hubert Humphrey) 전미 부통령이 살충제의 화학물질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할 것을 의회에 요청했다. 이휴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과학자문위원회를 구성해 농약사용 실태를 조사하면서 1969년 환경보호법안이 통과되고, 1972년 DDT가 추방되기에 이른 것이다.

새끼를 낳지 못하는 밍크 암컷, 부화 전에 죽고 마는 바다갈매기, 악어 등 생태계 문제로 국한되던 환경호르몬 논란은 인체에 대한 유해성마저 의심을 받으며 국면의 전환을 맞는다.

1966년 미국 메사추세추주의 10대 소년에게 발병한 질암의 원인으로 합성호르몬제제 디에틸스틸베스트롤(DES)이 지목된 것이 첫 사례.

1996년 동물학 박사 테오 콜본(Theo Colborn)은 '도둑맞은 미래(Our Stolen Future)'에서 '환경성 내분비계 교란물질이 야생동물과 인류의 생식, 면역, 정신기능의 장애와 교란을 유발하는 주범'이라고 지적해 환경호르몬 문제를 다시 수면 위로 올렸다.


추정 물질 포함하면 무려 '103종'

내분비계 교란물질은 낮은 농도에서 긴 시간에 걸쳐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 영향을 확인하고 대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다이옥신, 폴리염화비페닐(PCB), 수산화트리알킬주석(TBT), DES, DDT 등 확정된 화학물질 19종을 포함해 가능성이 있는 28종, 추정되는 26종 등을 내분비계 교란물질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미국 질병통제센터(CDC)는 48종, 세계야생보호기금(WWF)은 67종을 환경호르몬 물질로 분류해 다소 차이를 보이는데, 어느 한 기관에서라도 지정된 화학물질의 숫자는 무려 103종에 달한다.

우리나라는 현재 WWF 기준을 따르고 있다. 대중에게 흔히 알려진 환경호르몬으로는 변압기 절연유로 사용되는 PCB나 DDT, 합성세제 원료인 노닐페놀, 플라스틱 원료인 비스페놀A, 소각장에서 발생하는 다이옥신 정도가 꼽힌다. 다만 실험을 통해 생식기능장애 등의 영향이 입증된 물질은 농약의 DDT, 선박 바닥 도료의 성분인 유기주석화합물 정도여서 추가 연구가 시급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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