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특히 만성질환의 인종 또는 지역 간 유병특성 차이에 대한 보고들이 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인과 서양인 사이의 유병특성이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기전을 명확히 규명하기 위한 연구들이 한창이다. 이를 통해 환자 개개인의 임상특성을 고려한 맞춤치료의 실현 가능성도 한층 더 가시화되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의대 박경수(서울대병원 내분비내과) 교수팀이 ‘Lancet Diabetes & Endocrinology 11월 11일자 온라인판’에 보고한 연구논문이 한국인 만성질환의 유병특성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어 국내외 학계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서양인에 비해 비비만형 당뇨병이 많고 췌장 베타세포의 기능도 떨어진다는 것이 중론이었는데, 박 교수팀이 10년간의 추적·관찰연구를 통해 이 주장, 즉 상대적으로 감소돼 있는 인슐린 분비능의 저하가 한국인 당뇨병 발생의 주된 원인이라는 것을 규명했다. 이 유병특성을 임상에 적용할 경우, 한국인 당뇨병 환자의 치료 시에 인슐린 분비능 개선에 좀 더 초점을 두는 맞춤형 방식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

한국인 만성질환의 유병특성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인 만성질환의 유병특성은 크게 두 가지 갈래로 원인을 파악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오랜 기간 해당 지역만의 독특한 생활습관이나 지리·사회·문화·경제 환경 속에서 서양과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질환특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경우 유전적 요인이 개입됐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는 최근에 두드러지게 관찰되는 동향으로, 전통적 생활습관이 서양을 따라 변모하기 시작하면서 질환의 특성 또한 점차 서구화돼 가고 있는 현상이다.

아시아 지역은 기존의 전통적인 유병특성이 유지되는 동시에 서구화로 인한 질병패턴의 변화가 공존하는 과도기 단계에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뇌혈관질환이 여전히 높은 유병률을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출혈성이 감소하고 허혈성 뇌졸중이 증가하는 서구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서양에 비해 비비만형 당뇨병이 여전히 많으나, 비만형 역시 증가하고 있다. 이상지질혈증은 전통적으로 고중성지방혈증과 저HDL콜레스테롤혈증 비중이 높았지만, 상대적으로 서양인에서 강세였던 고LDL콜레스테롤혈증 또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유병특성 따라 달라지는 치료전략
한국인 만성질환의 유병특성을 고려한다면, 이를 치료하는 전략도 서양인 중심에서 우리나라 환자 중심으로 달라져야 한다. 정확한 맞춤치료를 위해서는 우리나라 만성질환 환자들에서 관찰되는 유전·환경적 요인에 의한 임상특성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전제된다. 이를 통해 서양과 차이를 보여 왔던 유병특성에 근거한 치료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특히 전통적 특성과 서구화 패턴이 공존하고 있는 만큼, 개별 환자에 대한 분석을 근거로 치료전략을 맞춰가야 한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질병의 인종·지역적 다양성은 최근 신흥시장으로 부상 중인 아시아 지역 연구결과가 급증하는 과정에서 소수의 데이터만이 축적되는 수준으로, 인종에 따른 치료전략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아직 부족함이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질환특성에 대한 역학 데이터를 비롯한 연구결과가 여전히 풍족하지 못한 실정이다. 한국인 대상의 임상시험 데이터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가이드라인 하나 만들기도 힘들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나라 의학계는 무던히도 노력해 왔다. 학계는 최근 들어 자구노력과 정부지원을 등에 업고 한국인 만성질환에 관한 기초·임상 데이터를 홍수처럼 쏟아내고 있다. 유수의 다국적제약기업이 지원하는 다기관·무작위·대조군 임상연구(RCT)가 국내에서 다수 진행되는 등 양질의 임상 데이터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렇게 축적된 한국인 만성질환 데이터는 한국인에 맞는 치료전략을 수립하고 적용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대한당뇨병학회, 한국지질동맥경화학회, 대한고혈압학회 등이 한국인의 임상특성 근거에 힘을 실은 당뇨병·이상지질혈증·고혈압 진료지침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이에 힘입은 바 크다.

한국인의 당뇨병
한국인에서 당뇨병 발생기전은 인슐린 저항성과 분비능의 장애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과거 전통적으로 인슐린 분비능이 취약한 가운데, 최근 들어 식생활습관의 서구화로 인해 비만이나 인슐린 저항성은 증가하고 있다. 박경수 교수팀은 인슐린이 기능을 못해 고혈당이 지속되고 있음(인슐린 저항성)에도 불구하고 인슐린을 계속 공급해야 할 췌장 베타세포 기능 역시 기대만큼 제 역할을 하지 못함(인슐린 분비능 저하)에 따라 제2형 당뇨병이 발생하는 기전이 한국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밝혔냈다. 본래 인슐린 분비능이 약한 데다가 인슐린 감수성마저 떨어지는 변화를 겪다 보니 혈당량 유지를 위해 췌장이 더 많은 부담을 안게 되고, 결국에는 지쳐버린 베타세포가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단독으로 감소된 인슐린 분비능을 높이면 당뇨병 발병위험을 줄일 수 있고, 더 나아가 효율적인 고혈당 치료를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이 연구팀의 설명이다. 혈당이 정상이거나 인슐린 분비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선별하고, 인슐린 분비능 저하의 원인과 이를 높이는 방법을 찾는 것이 한국인 당뇨병의 예방과 치료에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경구당부하검사의 필요성
국내 역학연구에 의해 밝혀진 한국인 당뇨병 환자의 임상특성은 진료지침의 고혈당 관리 권고안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대한당뇨병학회는 경구당부하검사와 관련해 “상대적으로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며 재현성, 검사비용, 1차 의료기관에서 활용도가 낮다”고 지적, “때문에 미국당뇨병학회(ADA)에서는 당뇨병의 진단에 경구당부하검사를 권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인의 당뇨병은 서양인에 비해 비비만형이 많고 인슐린 분비능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공복혈당만으로는 상당수의 당뇨병을 진단하지 못할 수 있다”며 인종특성에 따른 진단의 한계를 지적한다. 또 “이를 개선하기 위해 공복혈당의 진단기준을 낮추면 진단적 특이도가 낮아지고, 특히 노인인구에서 식후 고혈당만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아 공복혈당만으로 진단할 경우 내당능장애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당뇨병도 진단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경구당부하검사를 통한 명확한 진단이 요구된다”는 설명이다.

과거 대한당뇨병학회의 당뇨병 진료지침에 따르면, 우리나라 환자들은 식전혈당이 100mg/dL만 돼도 식후혈당이 200mg/dL을 넘는 경우가 상당수였다. 진단 시 식전혈당만을 근거로 했다가는 많은 수의 당뇨병 진단을 놓칠 수도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혈당강하제 1차선택 폭 넓어져
제2형 당뇨병 환자의 초치료 전략에 대한 다기관 무작위·대조군 임상연구로 UKPDS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PEAM 연구가 있다. 대한당뇨병학회 저널 Diabetes & Metabolism Journal 2011;35:26-33에 발표된 국내 독자적 연구 프로그램이다. 비비만형과 비만형 당뇨병 환자가 절반씩 포함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글리메피리드, 메트포르민, 로시글리타존의 혈당조절 효과를 비교한 결과 세 약제 모두 유의한 혈당조절 효과가 확인됐다.

대한당뇨병학회는 2015년 새 가이드라인을 통해 “(UKPDS와 PEAM 연구에 근거해) 단독요법 시 메트포르민을 초치료로 사용하도록 권고했고, 다만 환자의 상태에 따라 메트포르민 이외의 경구혈당강하제도 초기 단독요법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며 한국인에서 다약제 1차선택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인의 이상지질혈증
한국지질동맥경화학회가 최근 발표한 ‘Dyslipidemia Fact Sheet in Korea 2015’ 역학자료에 따르면 이상지질혈증의 3개 카테고리별 유병률은 고LDL콜레스테롤혈증이 15.5%, 고중성지방혈증 18.6%, 저HDL콜레스테롤혈증 28.4%로 집계됐다. 고LDL에 비해 고TG와 저HDL의 병태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는 한국인 이상지질혈증의 전통적인 유병특성이 확인된 것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고LDL콜레스테롤혈증, 고중성지방혈증, 저HDL콜레스테롤혈증이 동시에 겹치는 복합형 이상지질혈증이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를 두고 죽상동맥경화성 이상지질혈증이라고도 하는데 상대적으로 심혈관질환 위험이 더 높아진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스타틴에 비스타틴계 더하는 다중공략 전술 要
한국지질동맥경화학회가 새롭게 선을 보인 2015년 이상지질혈증 치료지침은 LDL 콜레스테롤 강하를 이상지질혈증 치료의 1차목표로 내세우는 동시에, 이를 위한 약물요법에 스타틴을 앞세우고 있다. 심혈관질환 위험도에 따라 LDL 콜레스테롤 목표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용량을 조절하라는 주문이다.

미국과 차별화되는 점은 고콜레스테롤혈증에만 국한하지 않고 고중성지방혈증과 저HDL콜레스테롤혈증까지 포함하는 종합적인 병태의 이상지질혈증을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스타틴에 더해지는 비스타틴계 요법도 약물치료의 한 축을 이룬다. 이상지질혈증 치료지침의 약물요법분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서울의대 김상현 교수(보라매병원 순환기내과)는 이에 대해 “우리나라 환자들에서 전통적으로 관찰되는 고TG·저HDL의 이상지질혈증 병태의 특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고 이유를 꼽았다.

한국인의 고혈압
한국인 고혈압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고혈압에 비만·고혈당·이상지질혈증 등 대사질환을 동반하는 경우, 즉 대사증후군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일련의 국내 역학 데이터에 따르면 고혈압 환자에서 당뇨병 유병률은 62.5%, 이상지질혈증 유병률은 62.8%로 여타 심혈관 위험인자의 동반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근 보건당국이 발표한 한국인 임상자료에서는 고혈압이 대사증후군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최근 5년간 대사증후군 관련 질환의 건강보험 심사결정 자료를 분석한 결과, 대사증후군 관련 질환의 절반가량이 고혈압(585만명)이었다. 나머지는 당뇨병(258만명), 고지혈증(144만명), 심혈관질환(102만명), 뇌혈관질환(101만명) 순이었다. 고혈압 환자에서 여타 대사질환이 동반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내분비학회(ENDO) 저널에 발표된 또 다른 한국인 역학연구에 따르면, 대사증후군 구성인자 가운데 당뇨병과 고혈압이 사망위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고됐다. 성균관의대 성기철·이은정 교수팀(강북삼성병원 순환기내과·내분비내과)이 원내 건강검진 환자 15만명 이상의 데이터를 후향적으로 관찰한 결과, 대사증후군 환자의 사망률이 1.6배 높은 가운데 고혈압과 당뇨병이 유의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고혈압학회 고혈압 진료지침
대한고혈압학회는 지난 2013년 새로운 ‘고혈압 진료지침’을 발표했다. 2004년 이후 10여년 만의 개정판이다. ‘혈압’보다는 ‘환자의 혈압’을 치료하도록 주문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혈압이라는 단일 수치에 얽매이기보다는 혈압을 포함한 환자의 임상특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치료하도록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혈압조절 = 심혈관질환 예방’이라는 공식을 이끌어내기 위해 치료전략의 내연을 넓힌 것이다.

2013 고혈압 진료지침의 가장 큰 변화이자 핵심은 심혈관 위험도 평가기준을 제시하고, 이에 근거해 치료방침을 세우도록 한 것이다. 과거 혈압만을 근거로 또는 혈압을 중심으로 치료가 계획되고 실천됐다면, 새로운 지침에서는 혈압과 더불어 심혈관 위험인자·표적장기손상·동반질환 등을 종합해 전체 심혈관 위험도(global cardiovascular risk)를 평가하도록 했다.

이 평가결과는 연이어 치료계획과 전략 수립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심혈관 저·중·고위험군이냐에 따라 약물치료 출발점이 달라지고, 환자의 동반질환 등 임상특성에 따라 약제의 선택도 다방면으로 구사된다.

진료지침이 “혈압을 조절해 혈압상승에 의한 심혈관질환을 예방하고 사망률을 낮추는 것”으로 치료목표를 명시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높아진 혈압이 혈관의 구조·기능적 변화와 궁극적인 심혈관질환의 복합적 원인 중 하나인 만큼, 고혈압 환자에서 이를 공략하는 것은 기본적인 전술이고 전략은 최종적으로 심혈관질환 위험을 낮추는 데 맞춰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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