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찍을 게 있냐?" 밤에 중무장 한 채 카메라를 메고, 무전기까지 들고 나서는 내게 대장님께서 던진 한마디다. 밤이라고 해봤자 하지 무렵에는 밤 10시에 해가 져서 새벽 1시 50분에 뜨기 때문에 어둡지도 않다.
 한국처럼 지평선으로 해가 뚝 떨어지고 뜨는 것이 아니라 지평선을 따라 미끄러져 들어갔던 해가 다시 지평선을 따라 올라온다. 해가 그냥 땅을 스치고 떠오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 싶다.
 2004년 12월 11일. 이곳 세종기지가 있는 킹조지섬에 도착해서 칠레공군기에서 내렸을 때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바람, 눈, 파도. 그 외 아무것도 없었다. 겨울에 하나 더 보게 된 것이라곤 그저 얼음바다. 지금도 바람, 눈, 파도 그대로다.
 2006년 1월말에 출남극해서 2월에야 한국에 도착할 생각을 하면 이곳 생활이 무려 14개월이나 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지난 1년이 가장 빨리 지나간 것 같다. 벌써 이곳에서 두번째 크리스마스와 신년을 보냈다.
 한국에 계신 분들과 메일이나 전화를 주고받으면 지겹겠다라는 위로를 가장 많이 듣는다. "뭐, 여기가 원래 그렇죠"라고 답하지만, 사실 난 이곳에서 1년동안 지겨울 틈 없이 바쁘게 지냈다.
 이젠 남극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겨울도 그전같이 춥지도 않고, 바다도 완전히 얼지 않고, 드물기는 하지만 중간 보급도 되고, IT 강국답게 인터넷도 타 기지에 비하면 월등히 잘 되어 있고 여러 가지로 1년을 지내기에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블리자드라는 강풍을 동반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영하의 날이 더 많고, 기지 앞에는 시커먼 크레바스를 동반한 빙하가 널려있고, 주위에 야생동물들이 즐비한 남극이다.
 2005년은 예년과는 달리 기지 내에 환자도 많았다. 손가락 골절환자, 탈구에서부터 안검에 생긴 농양, 피부이식 환자, 경비골 골절까지 유래없이 많은 환자가 발생했다. "의무대원이 한가하고 일이 없는 것은 곧 모든 대원들이 건강함의 반증"이라고 외친 나의 주장이 무색해졌다.
 더구나 늘상 환자를 대하는 한국에서야 그일이 그일이고 아무리 심하게 다친 사람을 대해도 덤덤하지만, 평소 몇 안되는 대원이 같이 잘 지내다 다쳐서 의무실을 찾을 때는 한국에서 경험하던 환자의 느낌과 사뭇 달라 조금은 색다른 긴장을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급기야는 지난 9월, 아르헨티나 기지 대원 2명이 세종기지 앞에 보이는 100미터 이상의 크레바스에 빠져 사망한 사건은 이곳 기지 모두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비록 한국에서는 인터넷의 작은 기사로 취급됐으나, 남극을 접하고 있는 남반구에 있는 나라나 남극 연구가 활발한 국가에서는 큰 사건으로 보도됐다.
 하지만 이곳이 꼭 모질고 혹독하기만 한 땅은 결코 아니었다. 대지위에 쌓인 두꺼운 얼음 밑에는 지극히 성장이 느린 지의류가 봄을 기다리고 있었고, 겨우내 떠났던 펭귄들도 번식을 위해서 이 차디찬 땅에 보금자리를 만들러 왔다. 바다를 온통 휘젓고 다니던 거대한 해표와 고래들도 새끼를 낳았고, 맹금류에 가까운 도둑갈매기도 귀여운 새끼들을 낳고 기르느라 분주했다.
 아무리 흐린 날이거나 구름이 잔뜩 낀 날도 차디찬 공기에 밀려 남극해 끝까지 보이는 맑은 공기는 어느 가을 날씨보다도 마음을 탁 트이게 한다. 주위의 모든 공기가 부족할 만큼 다 마셔도 또 마시고 싶은 곳이다. 서울 촌놈이 태어나서 은하수도 처음 봤고, 북반구에서 별로 본 사람이 없을 듯한 남십자성도 처음 봤다. 오리온이 북반구와 다르게 거꾸로 떠오르고, 달 모양도 반대로 뜨는 당연한 것도 참으로 신기하게 봤다. 한참 사진을 찍다가 카메라를 내려놓고 이 자연의 신비에 빠져 있는 나를 즐기기도 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눈과 얼음. 어디를 둘러봐도 바다. 혹자는 지겹고 따분하고 때로는 짜증이 나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의 얼음과 저 멀리 보이는 곳의 얼음도 같은 흰색이 아니고, 이곳은 햇볕이 따가울 정도의 날씨지만 저 멀리 보이는 곳은 눈보라가 치는 남극을 즐기고 있노라면 떠나는 날이 다가올수록 날짜 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새해를 맞이하는 한국은 겨울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뜨거운` 영하의 여름이다. 활기차다. 우중충한 겨울에 맞이하는 한국의 신년과는 사뭇 다르다. 해표 아가들은 벌써 사람 어른 키만큼 자랐고, 펭귄 아가들도 바다로 떠나기 전에 털갈이 하느라 바쁘다. 지금까지는 귀엽고 순한 도둑갈매기 새끼들도 남극의 포식자가 되기 위해 나는 연습에 여념이 없다. 이곳 세종기지도 하계 연구원들로 북적북적하다.
 이 활기찬 기분 그대로, 사시사철 희고 새파란 빛 그대로, 어느 곳을 봐도 확 트인 이 시선 그대로, 1년 내내 차디찬 냉철함 그대로, 새해를 맞이하는 한국에도, 의료 전반에도 이런 시원하고 통쾌한 기운이 깃들기를 고대한다.

홍 종 원
남극세종과학기지 18차 월동대 의무담당
성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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