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좌훈정 전 대한의사협회 감사

 

의협 일을 몇 년 하다보면 자꾸 쌓이는 게 정부에 대한 불신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번번이 약속을 어기는데, 심지어는 언제 그런 약속을 했냐고 오리발을 내민다.

이제 메르스사태도 슬슬 진정되려 하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의료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고 직간접적 피해를 보상하겠다’ 는 말이 쑥 들어가고 있다. 보상이야 처음부터 반신반의했던 것이지만, 문제점으로 드러난 의료시스템의 개선 역시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 하나가 지난 8일 보건복지부가 상급종합병원의 일반병상(다인실) 확보 비율을 현행 50%에서 70%로 확대하는 정책을 당초대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는 전날(7일)까지만 해도 다인실 비중을 축소하겠다는 입장을 뒤집은 것으로서, 병원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다인실을 6인실에서 4인실 위주로 전환하고, 1인실과 2인실의 별도 감염 병상을 보충하겠다는 구체적인 설명도 덧붙였다.

이번 메르스 감염 사례에서 보듯, 우리의 후진적인 병실구조 및 간병문화 등이 감염병의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 이유는 알다시피 원가에 미치지 못하는 저수가로 인해 의료기관들이 시설투자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상급종합병원을 비롯한 병원의 병상 기준이 강화된다면, 그에 따른 막대한 설비비와 관리비가 소요되는 것은 자명하다. 수가로 보전을 해주겠다고 하지만, 늘 그랬듯 충분히 지급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해당 병원들은 폐업을 하든지 아니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시설을 개보수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메르스발(發)’ 의료기관 시설인력 강화의 폭풍 속에서 생존자는 누가 될까. 역설적으로 이른바 ‘빅 5 병원’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환자들의 대형병원 쏠림과 그로 인한 난장판과 같은 응급실이나 다인실의 상황을 감염병 확산의 주범으로 지목하면서도, 정작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이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1,2인실 음압감염병상 설치는 물론이고 일반병상 또한 충분한 공간과 시설을 갖추도록 규제가 강화될 텐데, 저수가로 인한 만성 적자에 시달리는(진료 손실을 주차장·식당·매점·장례식장 등을 운영해 메우는) 우리나라 대부분 종합병원들은 이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나마 자본동원 능력이 있는 초대형병원들이 어디서든 돈을 끌어다 시설인력 기준을 맞출 것이고, 그 결과 ‘빅 5 병원’ 쏠림이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지금 응급환자와 입원대기 환자가 뒤섞여있는 응급실을 전면 개편해 이를 분리시킨다고 해보자. 규모를 늘릴수록 적자가 나는 응급실의 확대도 문제지만, ‘입원대기용 응급병상(가칭)’을 제대로 설치할 수 있는 종합병원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초대형병원들이 보란 듯이 시설 좋고 쾌적한 병상(입원대기용 포함)들을 갖추면, 과연 환자들이 어디로 쏠릴까.

대개 정부의 규제라는 것은 불공정한 시장을 바로잡는 데 사용되는 것이 상식이다. 우리 의료시장은 대부분의 의료가 단일공보험인 건강보험에 묶여 있어, 이미 많은 규제를 안고 시작된 것이다. 그렇잖아도 규모의 경제를 앞세운 대형병원들에 눌려 중소병원이나 의원들이 나날이 고사되고 있는데, 오히려 이를 부추기는 규제를 자꾸 신설한다면 의료전달시스템이나 바람직한 의료소비문화는 점점 더 파괴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많은 의사가 이번에 보상은 제대로 안 해줘도 좋으니 무거운 규제만 더 늘리지 말아달라고 생각하고 있다. 메르스 사태로 인한 유무형의 피해도 심각하지만, 이로 인해 들입다 채워질 족쇄 같은 규제와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더욱 무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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